수필 부문 가작 / 생명과학과 08 송유향

내가 지금껏 잊고 살아왔던 20년 전의 나의 집에는 단 한 명의 사람이 다 지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삶의 무게만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소위 말하는 ‘서민들이 사는 곳’이라는 산 아랫동네에조차 살 형편이 되지 못하여 아랫동네에서 윗동네에 위치한 조그만 집까지 올라가려면 ‘가파른 구간-골목길-가파른 구간’을 약 3~40분간 낑낑거리며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걸어야만 했다. 특히나 골목길은 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구간으로 매우 으슥하여 밤에 사람들이 다니기를 매우 꺼려하는 구간이었다. 성폭행범이 밤마다 그 골목길에서 숨어 있다던가 아니면 그 골목길에서는 새나 지나가는 동물들이 많이 죽어서 기가 좋지 않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들 정도였다. 어머니도 이 구간을 지나갈 때면 오한이 들어 주변을 계속 둘러보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노라고 했다. 이 골목길을 무사히 지나간다고 하여도 마지막 코스인 ‘가파른 구간’이 남아있었으니 아무 생각 없이 가파른 길을 따라 걷는 것만이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조그만 나의 집으로 도착하게 되면 어머니를 반기는 것은 1살 조금 지난 나와 3살이 된 언니, 그리고 엄청난 삶의 무게뿐이었다.

어머니께 있어 삶의 무게는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어머니의 옆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너무 많은 고통이 한꺼번에 오면 그 고통이 익숙해져버리는 순간이 온다고. 그렇듯이 어머니는 그 시절의 고통은 크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크거나 힘들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조그만 집에서 사는 것도 당연했고 두 어린 자식을 홀로 챙겨야 하는 것도 당연했고 여자의 몸으로 신혼생활 단 몇 년 만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던 것도 당연했다. 이런 당연한 삶 속에서 어머니의 일과는 항상 똑같았다.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한 아기에 불과했던 내가 어머니를 찾아 울면 새벽이든 아침이든 일어나 달래줘야 했고 그 때부터 어머니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먼저 언니의 아침을 챙겨주고 부리나케 집 안을 깨끗이 닦고 앉은뱅이책상들을 정리하고 있자면 곧 초등학생 대여섯 명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책상을 차지하고 앉았다. 점심때부터 저녁때까지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면 다시 언니와 나를 보살피는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밥을 먹이고 청소, 빨래를 하고 나면 하루가 어느새 다 가 버리고 자야 하는 시간이 되곤 했다. 로봇같이 매번 똑같은 삶을 살아가려면 지겨울 만도 하였지만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오직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어머니께서 택하셨던 일이 과외선생님이었다. 두 어린 자식만 남겨둔 채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는 모습을 본 후, 장례식장에서 나온 직후부터 어머니의 머릿속은 온통 앞으로 뭘 하고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학교 주변 동네문방구점이 꽤 잘 되는 편이었고 어머니는 집에서 꽤 떨어진 유명학원원장선생님이셨다. 계속 학원을 운영해 나가면서 자식들을 제대로 키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어머니께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학원의 원장자리를 가장 아끼고 믿는 후배인 선생님께 전임하고 학원을 나와 계속 고민을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께는 무려 6~7년간을 학원에 몸을 바쳐왔던 터라 쉽사리 직업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옮기기란 무척 힘든 결정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고민 끝에 한창 잘 되는 사업으로 뜨고 있는 문방구점 대신 집에서 과외를 하면서 우리를 돌보기로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 한 선택이라고 하신다. 사실 나도 어머니께서 문방구점주인 대신 과외선생님을 택하신 덕분에 언니와 내가 지금껏 교육을 잘 받아서 훌륭하게 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나는 정말 착하고 순한 아기였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과외를 하실 때는 조용히 안방에서 자거나 혼자 글자 맞추기 놀이를 하는 등 하루 종일 혼자서도 잘 놀고 있는 순한 아기 말이다. 애교는 거의 없는 편이였지만 울음도 적고 낯도 별로 가리지 않아서 조용하게 잘 자라나는 것 같더라고 어머니께서는 웃으며 말씀하신다. 그에 비해서 언니는 울음은 적어서 시끄럽지는 않지만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서 많이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기였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갈 때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다니는 반면, 언니는 어느새 앞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물건 파는 아주머니들 한분한분께 방긋거리며 배꼽인사를 하고 다니는 언니는 단연 인기 만점인 어린이였다. 어머니께서는 넓은 시장바닥에서 언니를 잃어버릴까봐 매번 불안해했으나 오랜만의 외출에 행복해하며 뛰어다니는 언니를 마냥 야단칠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언니는 얼굴도 예쁘장한데다가 어딜 가도 인사도 잘하고 귀여운 짓도 잘 해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런 모습이 부러워서 언니 옷자락을 잡고 따라다니면서 언니 행동을 몰래 따라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몸집의 어린 내가 언니를 따라다니기란 정말 힘든 일이였기에 도중에 넘어져 울면서 집에 가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보면 내 팔이나 다리, 무릎부근에 상처자국이 아직 남아 있다.

나의 유년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때는 돈이 없고 무척 가난했기에 언니와 나는 유치원도 얼마 다니지 못하고 중간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적에 다른 친구들의 집에 가서 베레모를 쓰고 활짝 웃고 있는 친구의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속으로 부러워했었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에 유치원 졸업사진을 봤었을 때는 그게 뭔지를 몰라 친구에게 물어봤다가 웃음거리가 되어서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었다. 그 후 가끔 친구들이 나의 집으로 와서 내 어릴 적 졸업사진도 보고 싶다고 하면 과민반응까지 할 정도로 싫어했었다. 그만큼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부끄러운 상처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신 집에서 어머니께서 직접 나에게 산수며 받아쓰기며 대부분의 교육을 다 해주셨기에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1학년이 다 마쳐갈 때까지 받아쓰기를 제대로 못해서 매우 골머리를 썩인 적은 있었으나 머리가 영특했던 언니의 도움으로 점점 나아져갔다.

또 하나의 다른 나의 상처는 아버지가 있는지 물어보는 순진한 친구들의 물음 때문에 생겨났다. 지금은 당당하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지만 어린 나이에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슬프거나 아버지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순전히 친구들의 비웃는 듯 똥그란 눈동자가 싫었다. 남이 가진 것이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 섞인 짜증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물어오면 아버지께서는 돈을 벌려고 외국에 가서 생활하신다고 매번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가정환경조사서에도 ‘사망’이 아닌 ‘외국에 가서 생활하심’이라고 적은 적도 있었다. 

어릴 적에는 집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남들과 친해지는 것을 잘 못하던 나여서 내 주변에 같이 놀 사람은 언니 외에는 딱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언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제 2의 보호자나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조차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언니의 반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언니와 얘기하는 것을 더 좋아할 정도였다. 그만큼 언니도 맛있는 것이 생기면 꼭 나를 위해서 조금 남겨오거나 나를 괴롭히는 애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자청할 정도로 나를 많이 예뻐해 주었다. 언니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섭고 못된 성격을 가진 아이였을지라도 나에게만큼은 항상 상냥함과 웃음만을 보여주는 다정한 언니였다. 어머니께서 많이 바쁘셨기 때문에 언니와 나는 서로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며 지내왔고 우리만의 놀이도 많이 만들어 내어 놀곤 했다. 그 중에서도 피난민놀이가 언니와 내가 그 당시가 가장 즐겨하던 놀이였다. 어머니께서 된장찌개나 계란찜을 만들어 놓고 잠깐 집을 비우시면 우리 둘은 식탁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 대신 우리가 피난민인 것처럼 상황을 설정한 뒤 밥을 아껴먹어야 한다거나 내일은 어디로 피난가야 하는가라는 둥 우리만의 상황극을 만들어내며 놀곤 했다.
그 외에도 그 당시에 초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유행했던 놀이인 스티커인형옷입히기 놀이라던가 아니면 인형그림 누가 더 예쁘게 그리나 같은 놀이를 같이 많이 하고 놀았었다. 언니가 6개월 동안이나 고이고이 모셔둔 내가 탐내고 있던 인형옷세트스티커를 나에게 주겠다고 했을 때의 그 흥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언니를 부둥켜안으며 언니에게 내가 아끼던 연필까지 줄 정도였다. 그 인형옷세트스티커가 한참이나 유행이 지난 것인 줄 알았다면 내가 그 정도로 흥분하지 않았을까. 인형그림 그리기는 언니보다는 내가 더 나은 편이었다. 나는 학교에서도 심심할 때마다 연습장이나 책 맨 뒤쪽을 펼쳐 인형그림을 그려서 공주와 왕자를 결혼시키는 등 나만의 세계에 많이 빠져 있는 편이여서 내 그림실력은 독특하면서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미술학원을 다닐 적부터 그림그리기는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자신 있는 분야였기에 실제로 초등학교나 유치원 다닐 적에도 그림대회에 큰 상을 받아오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때는 언니에게 알 수 없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림그리기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뿌듯함이 느껴졌었다.

2살이 채 되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는 조금도 없다. 오직, 어머니께 전해들은 몇 가지 얘기들과 영정사진으로 남아 있는 모습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이나 아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머니께서 채우려고 애쓰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께서 20년간 계속된 관심과 노력을 나에게 쏟아 부었기에 아버지가 그리워 청승을 떠는 일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사실상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에서 어머니를 도와주었다면 조금 더 어머니께서 덜 고생하지 않을까 싶지만 어머니께서는 이에 대해서 불만불평도 없으셨다. 대신 자신의 자식을 남들에게 꿀리지 않게 키우기 위해서 자신의 욕심 대신 자식의 교육을 위해 과외를 시작하며 돈을 버셨다. 다른 어느 어머니보다 더 유별난 어머니의 교육열 덕택에 언니와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까지도 아무런 경제적 부담 없이 계속해서 좋은 학교,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그 당시 재혼을 하셨더라면 지금과 같은 교육을 받으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곤 한다. 어머니께서는 다른 것은 다 자신이 책임질 테니 우리에게는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위해 공부만 열심히 해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초등학교에서 우리 두 자매가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아오고, 언니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하여 선서까지 하고 들어가게 되었으니 어머니는 자신의 딸들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잘할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중학교 1학년 성적이 100등 가까이 나온 것부터 시작해서 주변 친가에서의 어머니를 향한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어머니께서 조금씩 힘들어 하셨다. 그 때 나는 내 머리가 정말 안 좋다고 믿었었고 나만의 사춘기가 점점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예전에도 별로 말이 없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 살던 나에게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집에 오면 언니와도 대화를 하지 않은 채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곤 하고 학교 성적 또한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결국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처음으로 매를 드셨다. 반성을 하면서 무엇이 잘못이며 어떻게 고칠지 스스로 생각해서 말할 때까지 밖에 있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이대로 가출이라도 해버릴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1시간 후, 얼굴이 온통 얼어서 빨개지고 옷도 따뜻하게 차려입지 않으신 채 내가 앉아있는 지하철역의자로 찾아오신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정말 못된 자식이라는 생각을 절실히 느꼈다. 어머니의 옷에 달려 있는 호주머니에 손을 같이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도 나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걸음만 옮겼지만 어머니도 나도 내가 뭔가를 깨달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중학교 2학년 성적은 급속도로 올랐고 결국 중학교를 전체 3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덕분에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길은 별다른 장애물 없는 잘 닦여진 길이였고 어머니께서 우리 동네 어디에서든 자랑하며 다닐 수 있을만한 유명한 명문대 학생이 되었다.

언니와 내가 우리 나름의 즐거운 생활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 뒤에는 항상 어머니께서 계셨다.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로 인식되어 와서 그런지 어머니께서 이 시절에는 얼마만큼 힘들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셨을까와 같은 생각을 깊게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이 대부분 즐겁기만 하고 힘들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께서 우리가 흘리고 갔던 잘못이나 우리가 겪거나 느끼게 되었을 수도 있던 아픔이나 배고픔을 모두 뒤에서 어머니께서 지고 오셨기 때문인 것 같다.

대학생 1학년 시절, 양이 많고 내용이 어려운 전공공부에 힘들어하던 내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던 때에 나를 다시 바로 잡아준 것도 어머니의 미니홈피에 써져 있는 두 개의 게시글이었다. 컴퓨터를 많이 다루어 보지 못하셔서 익숙지 못한 타자실력에도 불구하고 꽤 긴 내용의 편지가 2개 적혀 있었다. 적힌 날짜에서도 한참 지난 상태였지만, 그 편지를 읽는 순간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두 번째로 어머니께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은 심정이 든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편지에 공부 때문에 힘들어하고 짜증이 늘어난 둘째딸, 나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을 적어 놓으셨었다. 그 중에서 ‘아직은 내가 필요할 것 같아 다가가면 지들은 이제 내가 필요치 않단다. 어렸을 때는 자식의 행복과 불행을 모두 공유할 수 있었는데 이젠 지들 힘들 때만 나도 가슴아파해야 할 수 있는 정도만 허락된다.’라는 글귀를 읽었을 때 평소의 나의 행동으로 인해 어머니께서 느끼실 힘듦이나 슬픔을 내가 지금껏 모른척해 왔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와 동시에 결국 나는 내가 느끼는 아픔이나 힘듦으로 인한 삶의 무게는 모두 어머니께 떠넘겨 버리고 도망가 버리는 딸이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등학생일 때도 심지어 현재 대학생일 때도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따끔한 충고와 걱정아래에서 내 잘못을 뉘우치고 지내고 있다. 아직 어머니의 눈에는 나는 보살피고 지켜봐야 할 게 한참이나 남은 어린 자식일 뿐인 것이다. 나는 언제쯤 ‘둘째딸’이라는 삶의 무게를 어머니로부터 덜어 드릴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고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20년의 세월동안 어머니의 한쪽 어깨를 짓누른 무게를 이제는 서서히 걷어드릴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동안 어머니께 전부 맡겨와 잊어왔던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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