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가작 / 물리학과 08 박성윤

“정말로 안 가겠다는 말이지? 흠, J가 많이 기다릴 텐데……. 뭐, 그거야 네 맘이지."

묘한 여운을 남기며 그녀가 말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마지막 말은 자신과 관계없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맺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었다는 말을 앞세워 책임을 피해보려는 얕은 수일 뿐이고, 실제로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내 반응을 살피고 있다. 책장이 한 장 넘어가면 그녀의 시선이 내 어깨 가에 와서 닿고, 떨어졌다가, 종이를 넘기면 또 슬쩍 와 닿는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책을 덮는다. 더 이상은 무리다.

“지금 몇 시지?”

“9시 51분. 공연 시작한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네. 빨리 가야 할 걸?”

그녀가 여전히 관심 없다는 듯, 그러나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다. 그녀는 침대에 가로로 누워 발장난을 치며 내가 허둥대는 모습을 지켜본다. 살짝 접힌 눈이 마치, 나는 네가 결국 J에게 갈 줄 알고 있었어, 라고 말하는 듯 해 나는 볼멘 목소리로 말한다.

“숙제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그런 거야. 아직 잘 시간은 한참 남았으니까.”

“흐응, 그래? 뭐, 오늘따라 마침 숙제가 일찍 끝났다니 다행이네. 오늘따라 말이야.”

모두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억양이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교수님이 추가문제 내주시는 걸 깜빡하셨을 뿐이야. 몰라, 늦었으니까 나중에 얘기해.”

나는 대충 둘러대며 가방을 챙긴다. 하나뿐인 게스의 검정색 인조가죽 가방에 물건을 던지듯 담는다. 전공 책도 넉넉히 들어갈 크기의 가방에 달랑 지갑과 휴대전화가 들어있는 모습이 우습다.

“그래, 교수님이 때마침 숙제를 덜 내주셨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걸 제외하고도 숙제가 꽤 많던데……. 저녁도 안 먹고 책상에 붙어있던 보람이 있네?”

붉은 입술을 삐죽이며 그녀가 말한다. 나는 대꾸 없이 구두를 신경질적으로 구겨 신는다. 딱히 할 말이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을 저렇게 비비꼬며 말하는 것을 보니 내가 조금 전까지 그녀의 말을 무시한데에 꽤나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그러나 속이 상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문 채 기숙사 현관문을 연다.

 

“잠깐만!”

 

그녀가 다급하게 나를 부른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를 돌아본다.

“그러고 갈 거야? 얼굴 말이야.”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 묻는다. 현관 옆의 거울을 살피는 내 얼굴이 흠칫 굳는다.

“흐응, 방금 전까지 역학 문제와 씨름하던 그런 얼굴로 J를 만나러 가겠다는 거지?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네 맘이니까.”

그녀는 그제야 좀 전까지의 여유를 찾고 다시 딴청을 부리며 말하기 시작한다.

“J는 이해해줄거야. 착하니까. 그냥 나는 네가 좀 걱정이 돼서 그런 거지. 넌 그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J를 볼 수 있니?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넌 아직 너무 수줍고 부끄러운 아이지 않아?”

“화장품 주머니, 던져줘.”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지 말고 잠깐 신발 벗고 올라오지? 내가 빨리 해줄게.”라고 그녀는 선심 쓰듯 말한다.

 

“며칠 밤새더니 피부가 많이 상했네? 피부화장은 중요하지. 화장의 기본이니까.”

그녀는 파운데이션 뚜껑을 열며 큰 언니라도 된 듯이 말한다.

“아이라인을 잘 그리는 사람이 진짜 화장을 잘하는 사람이야. 가장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지. 너 이제 보니 눈이 꽤 예뻤구나? 속눈썹도 길고.”

그 언젠 가처럼, 그녀는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며 손을 놀린다. 얼굴에 와 닿는 브러시의 느낌이 좋다. 그 때 그녀가 다시 화장품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빛나는 붉은색이 그녀의 손을 타고 올라온다. 뚜껑을 연다. 샤넬 217, 레드샤인, 곧 흘러넘칠 듯 진득한 액체가 내 입술을 덮는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붉은 립스틱이지. 이 강렬한 붉은색은 네 얼굴을 덮은 색소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견고한 가면을 만든다. 그 가면은 너를 가리지. 우리 속에서 빠끔히 나와 관찰만 하는 수줍고 부끄러운, 아직 어린 두 눈을 가리고 열망하는 여자의 눈을 일깨운다. 그리고 마법이 시작되는 거지. 얼굴을 때리는 우리 밖의 강한 바람도 이 가면을 넘어 널 해치진 못할 거야.”

 

그녀는 그 언젠 가처럼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맺으며 내 손에 거울을 들려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보인다. 그 안에서 일렁이는 두 눈도 보인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워 그 빛을 가린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간다. “좋아, 잘 다녀와.” 빈 가방 속에 화장품 주머니를 넣어주며 그녀가 말한다.

 

 

 

밤공기는 차고 건조하다. 길게 말아 올린 속눈썹을 흔들고 콧등을 타고 내려와 입가에 와 닿는다. 쫀득쫀득한 립스틱 위를 지나며 어느새 끈적끈적해진 밤공기는, 기이한 열기를 품고 몸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이 마법인가. 이 밀도 높은 붉은색은 사람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그녀도 J도 이런 울렁임 속에 찾아왔다. 나의 생일날, 마법처럼.

작년 이맘 때, 그러니까 모두들 학기말고사 공부에 한창이던 어느 날 밤 나는 기숙사 책상 앞에 앉아 시계를 보고 있었다. 시계바늘이 열두시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가 손톱 끝 옅은 분홍색 매니큐어가 벗겨지려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 다시 내리기를 몇 번, 기숙사 문 밖에서 소리를 죽인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태연을 가장하며 책을 펼쳤다. 천천히 초를 세었다. 3, 2, 1, 문이 열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민경의…….”

우리가 서로 알게 된 지는 5년, 죽마고우라 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하고, 그저 그런 사이라 하기에는 지난 추억에 미련이 남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5년은 독기로 찬 과학고 여학생들의 지독한 경쟁의식을 일종의 동지의식으로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처음 고등학교의 비좁은 기숙사 방에서 마주쳐 서로의 영역을 다투듯 날을 세우던 너는, 어느새 나와 손잡고 카이스트 정문을 넘게 되었고, 굳게 닫힌 기숙사 철문이 무색하게 나의 방을, 우리의 공간을 드나들게 되었다.

“우리는 공대여자니까”

너의 입버릇은 우리를 더욱 견고히 하여 나는 너에게 상처 주고 또, 우리에게 더 상처 입으며 그렇게 우리는 5년의 우정을 지켜왔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누군가의 생일은 그런 우정을 확인 받는 자리이자 반복되는 일상속의 작은 재미거리였다.

촛농이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 흐르고, 친구들의 노랫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나는 서둘러 촛불을 껐다. “빨리 선물 열어봐” 누군가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다른 친구들도 장난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재촉했다. 나는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작년에 선물 받아 한 번도 입지 못한 꽃분홍색 레이스 속옷이 생각났다.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은 선물을 진짜 선물과 함께 준비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우리만의 놀이였다.

‘샤넬?’

쇼핑백 속으로 낯익은 상표가 그려진 상자가 보였다. 상자를 여니 크리스마스를 생각나게 하는 설레는 붉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혹시, 샤넬 217 레드샤인?’

나는 순간 그 립스틱이 친구들이 준비한 진짜 선물일거라 생각했다. 갤러리아 백화점 1층 에스컬레이터 앞을 지날 때 마다 나를 바라보던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의 파란 눈, 꿈결처럼 풀린 눈빛, 살짝 베어 문, 타는 듯 붉은 입술, 을 마주하며 나는 얼마나 설레었던가.

 

“빨리 발라봐.”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날의 놀이는 샤넬 217이었다.

 

“야, 너무 빨게. 이런 걸 어떻게 바르고 다녀.”

 

이런 걸 어떻게 바르고 다녀.

 

억지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입 근육들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않는다. 친구들은 짓궂게 웃으며 립스틱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꼼꼼하게 색칠해주었다.

친구들의 진짜 선물은 같은 브랜드의 황금색 매니큐어였다. 217번 레드샤인과 함께 크리스마스 컬렉션으로 제작되어 29,000원이라는 과분한 몸값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약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 매니큐어를 친구들은 자랑스럽다는 듯 내어놓았다. 웬만한 기초 화장품 가격을 웃도는 그것을 보면 엄마는 잔소리를 늘어놓겠지만 우리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안에 남게 해주는 것이었다. 대학에 온 지 벌써 이 년,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남자 동문들과 달리 우리가 지속적인 관계를 갖게 된 데에는 매니큐어의 힘이 컸다. 우리는 과제가 없는 날 밤이면 한 방에 모여앉아 야식을 시켜먹으며 매니큐어를 발랐다. 책꽂이 한 구석에 향수병처럼 색깔별로 진열되어 있는 매니큐어를 자랑스레 선보이고, 빌려주고, 빌리고, 가끔은 새로운 색을 찾아 함께 학교를 나섰다. 일 년의 대부분을 단색 피케 셔츠에 철지난 청바지로 버텨도 우리의 발톱은 언제나 계절에 어울리는 색으로 빛났다. 즐거웠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그녀는 불 꺼진 복도의 끝, 공동 화장실 앞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나는 시험을 핑계로 서둘러 돌아간 친구들을 대신해 그날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 앞 분리수거함에 케이크 상자를 버리고, 바닥에 흩어져있는 캔을 줍고, 손에 묻은 생크림을 닦은 후, 입가에 번진 붉은 립스틱을 지우려 폼 클렌저를 짜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나는 곧 얼굴이 달아올랐다. 구불구불 웨이브 진 머리, 지루하다는 듯 반쯤 감은 눈, 마르고 창백한 얼굴과, 그리고 새빨간 입술.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것일까? 왜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을까? 같은 공간에 살고 있음이 분명한 그녀지만 나는 그녀를 본 기억이 전혀 없다. 그녀에 대한 소문조차 들은 기억이 없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예쁘다. 참 매력적이야, 그 입술”

 

예쁘다. 매력적이야. 입술.

 

얼굴을 들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반으로 접히며 고양이처럼 곡선을 그린다. 나는 당황해 고개를 숙인다. 허둥지둥 손에 짠 폼 클렌저를 입술에 문지른다.

“왜 지워? 예쁜데.” 그녀가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쁜데.

 

나는 대답 없이 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내일, 시험 있니?”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잘됐네. 따라와 봐.”

 

그 날 내가 어째서 그녀를 순순히 따라갔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때,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작은 곡선을 그리며 말할 때, 그 입에서 나온 말들이 끈적끈적하게 날 감싸던 느낌만은 남아있다.

 

“와, 이게 그 유명한 217번 레드샤인이구나. 역시 한 번 발라보고 지우기에는 아까운 색이지? 하지만 이걸 바르기 전에는 준비를 좀 해줘야지. 다른 화장품 가진 거 없어?”

다짜고짜 철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그녀는 능청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얼떨결에 책상 서랍을 뒤져 작은 주머니를 하나 건네주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엄마가 챙겨준 화장품 주머니는 서랍 밖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새것과 다름없는 화장품들을 보고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재빠른 솜씨로 붓을 바꾸어가며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피부화장은 정말 중요하지. 화장의 기본이니까.”

큰 언니라도 된 것처럼, 그녀는 말한다.

“아이라인은 가장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지. 너 눈이 꽤 예쁘구나? 속눈썹도 길고.”

그녀는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며 손을 놀린다. 얼굴에 와 닿는 브러시의 느낌이 좋다. 그리고 드디어 샤넬 217의 뚜껑이 열린다. 빛나는 붉은색이 그녀의 손을 타고 올라온다. 레드샤인, 곧 흘러넘칠 듯 진득한 액체가 내 입술을 덮는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붉은 립스틱이지. 이 강렬한 붉은색은 네 얼굴을 덮은 색소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견고한 가면을 만든다. 그 가면은 너를 가리지. 우리 속에서 빠끔히 나와 관찰만 하는 수줍고 부끄러운, 아직 어린 두 눈을 가리고 열망하는 여자의 눈을 일깨운다. 그리고 마법이 시작되는 거지. 얼굴을 때리는 우리 밖의 강한 바람도 이 가면을 넘어 널 해치진 못할 거야.”

 

그녀의 확신에 찬 주문은 곧 이루어졌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간 늦은 시간의 재즈 바, 내 얼굴에 가면처럼 덧씌워진 샤넬 217이 아니었다면 땀에 젖은 노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걸어온 J에게 그토록 여유 있는 웃음으로 답하진 못했을 것이다.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가씨?”

J는 언제나와 같이 땀에 젖은 노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걸어온다. 콧방울에 몽글몽글 맺힌 땀방울에서 조금 전까지의 공연의 열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드릴게요.”

나는 언제나와 같이 다소 과장된 말투로 톡 쏘듯이 대답한다.

“조금 늦었네? 나의 멋진 모습을 놓치다니, 아쉬워서 어떡하나?”

“조금보다는 많이 늦었지. 미안해.”

“너희 학교 곧 기말고사인 것 아는데 뭐.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 좋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J는 역시 화를 내지 않는다. 늘 그래왔듯이 큰 입을 벌려 시원스레 웃으며 내 옆에 털썩 앉는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기울이고 내 눈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자세다. 살짝 구부린 등, 촛불에 반짝이는 머리끝의 물방울들이 마치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붉은 입술을 끌어당겨 미소 짓는다. 이 모습이다. 바로 이 모습이 내게 늘 핑계를 대게 한다.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녀에게 기숙사 철문을 열어주도록 한다. 기말고사가 일주일 남은 겨울밤, 책상 서랍에서 붉은 가면을 꺼내 쓰고 도둑고양이처럼 학교를 등지게 만든다.

J를 처음 만난 그 날, 상기된 얼굴로 베이스를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얼마나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나는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두운 바, 강렬한 오렌지 색 조명, 그 아래 더 밝게 빛나던 그의 노란 머리와 그 끝에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있던 땀방울들. 무엇보다도 그 표정, 세상에 홀로 존재함을 기뻐하는 것 같던 그 표정이란. 그가 무대에서 완전히 내려올 때 까지 나는 단 한 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주를 마친 그는 커다란 베이스를 등에 지고 재즈바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각한 이야기였는지 꽤나 준수한 얼굴이 잔뜩 찌푸려있었다. 주름 잡힌 입가며 좁혀진 미간이 조금씩 달아오르나 싶을 때 주인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큰 입을 벌려 시원스레 웃고는 베이스를 테이블에 기대어 놓은 채 내게로 똑바로 걸어왔다.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가씨? 다시 고용된 기념으로 술은 제가 사죠.”

 

그 후로도 그는 주기적으로 주인과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가 끝나면 시원하게 웃으며 내게 술을 샀다. 그렇지 않은 날은 대게 술을 마시는 내 옆에 앉아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지만 비밀이 많은 성격 또한 아니어서 나는 곧 대강의 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어쩌면 몽상가. 가진 거라곤 중고 베이스가 전부인 떠돌이 음악가. 자신만을 위한 쉴 터가 없는 것은 나와 닮았다. 그 어느 날도 얹혀사는 형의 자취방에서 설거지를 해주고 나왔다는 그는, 하루빨리 돈을 모아 서울에서 음악을 할 거라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었다. 그의 연주는 내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딱 그만큼,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도 그것을 알기에 대전 구석의 이 낡은 바에 숨어들었겠지. 이 작은 바에서조차 한 달에 한 번 계약을 갱신하며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재주로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는지. 더군다나 이 바에서 받는 월급을 모아서는 십 년이 걸려도 서울에서 머물 작은 방조차 얻을 수 없을 터였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우선 졸업부터하고 아버지 회사에라도 취직해. 직장인 밴드 정도가 좋겠다. 몇 마디 충고를 하려던 나는 그러나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어린 소년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과 마주한 까닭이다. 그때 그의 두 눈은 무언가 물어주지 않으면 미안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찌푸려진 나의 미간이 문득 내 아버지의 주름살처럼 느껴져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마지못해 그의 꿈이며 이상이며를 물었다. 그는 대답에 인색하지 않았다. 우린 친구가 되었다.

 

“뭐야, 촌스럽게. 왜 이름을 비밀이래? 그럼 나도 비밀 할래. 그냥 J라고 불러.”

 

그러나 나는 그의 이름을 다시 묻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현실과 꿈의 균형을 잃은 어리석은 젊음일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다려지지 않은 셔츠가, 가게 주인과 이야기하는 굳은 얼굴이 구질구질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꿈틀거리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우리 안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마치 샤넬 217처럼 나를 울렁이게 했다. 우리의 단조롭고 안정적인 일상과는 다른 것. 그래서였을 거다. 그에게 하나, 둘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 것은. M을, 내 욕망의 결정을 만들어 낸 것은.

 

 

 

그녀처럼 무관심한 듯, 냉소적으로 붉은 입술을 움직여본다. 정지한 대학의 일상을 경멸한다. 고독을 호소한다. 미칠 것 같은 구속감, 나는 우리안의 양들과는 다르다. 내가 하루하루 저지른 죄들은 그들과 나를 구분하는 증거다. 오늘도 나는 짓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 그의 앞에서 고해성사 하듯이 내뱉는다. 붉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나의 욕망이다.

그는 조용히 내 말을 듣는다. 이마의 땀방울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의 활엽수림과 같이, 그는 멈추어 나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대화가 끊어진다. 할 이야기가 떨어진 탓이다. 시험이 일주일 남은 지금, 내게는 이야기 거리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여유도 없다. 짧고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그가 문득 말한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다.

“음, 오늘은 M의 친구 이야기를 해주면 안 돼? 한 번도 해준 적 없어. 궁금하다.”

나는 느릿느릿 입을 연다.

“음, 내 친구들은,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불쑥 자기소개를 부탁받았을 때처럼 할 말이 있는 듯, 없는 듯, 입가를 맴돌다 숨어버린다.

“예뻐?”

J가 가벼운 말투로 묻는다.

“뭐야, 남자들은 궁금한 게 그것밖에 없지?”

그제야 나는 한결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살짝 눈을 흘기며 대꾸한다.

“M의 친구면 당연히 예쁠 텐데, 내가 괜한 걸 물었나?”

J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예뻐.”

나는 입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툭 던지듯이 대답한다. 눈앞의 술잔을 집어 든다.

 

“역시. 그런데 기숙사에 같이 사니까 진짜 친하겠다. 매일 만나서 뭐하고 놀아?”

J는 정말로 궁금했던지 눈까지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그냥, 그냥 숙제하고 가끔 매니큐어도 바르고 그래.”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한다.

“매니큐어? 나는 손톱이랑 발톱이 예쁜 여자가 좋더라. 작은 곳까지 신경 쓴다는 느낌이 들어.”

J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아, 그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음?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 왜 바르는 건데?”

J가 얼굴을 가까이 하며 다시 한 번 묻는다. 언젠가 내 화장품 주머니를 살피던 그녀가 입가에 잔뜩 비웃음을 머금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너희 진짜 웃긴 거 알아? 발톱에 삼만 원짜리 매니큐어 바르는 것 보다 얼굴에 싸구려 립스틱 하나 바르는 게 더 예뻐 보일 걸? 아니면 손톱에라도 바르던가. 도대체 보이지도 않는 발톱에 왜 그렇게 공을 들이는 건데? 매니큐어가 불쌍할 정도야. 아아, 잔인한 구두여.”

 

침대 귀퉁이에 앉아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리던 그녀의 말마따나 매니큐어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조금 일그러진 구석이 있었다. 누구하나 우리에게 촌스러움을 강요한 적 없건만, 우리는 언제나 온 몸에 ‘한국과학기술원 여자’를 두르고 발톱만을 은밀한 해방구로 남겨 놓았다. 그리고 그건 J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입술을 내밀어 J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그건, 비밀이야.”

 

“비밀, 비밀이구나.”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J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는 것 같다. 나는 묻는다. “왜 그래?”

“뭐가? 아, 나 무대 정리하러 가야겠다. 참, 시험 끝나면 친구들이랑 한 번 놀러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는 여전히 경쾌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나는 불안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음 한 구석이 싸해져 온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태연한 척 묻는다.

“그냥, 친구들 예쁘다며?”

J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답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M의 이름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M의 이름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의 마지막 말은 스치듯이 지나가서 어쩌면 내가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시험에 집중해야 할 때다.

 

 

시험은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 일주일을 보고 나야 끝난다. J의 바에서 돌아온 후 이 주 동안 나는 그녀조차 찾아오지 않는 5평 남짓한 작은 방에 틀어박혔다. 두꺼운 커튼은 가느다란 햇빛 한 줄기도 허락하지 않았고, 푸른 스탠드 조명 아래 내 얼굴은 더욱 창백할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어둔 방에는 탁상시계의 초침만이 살아있었다. 어김없이 내 생일이 지나갔고, 올해에는 철문이 열리지 않았다.

 

생일축하!문자로말해서미안내일전공시험이라대신응미시험끝나면나가서파티하자오랜만에술도한잔오키?

 

글자 수 제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듯 휴대전화 화면 한 가득 다닥다닥 붙여 쓴 문자메시지는 친구들이 보이는 납득할 만한 성의였다.

 

응용미적분학 시험의 끝을 알리는 조교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10시다. 금요일 밤 10시, 거의 모두에게 마지막 시험이었던지 대강당에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백여 명의 발걸음이 가볍다. 나도 그 속에서 걸음을 재촉한다. 낡은 문고리에서 힘주어 열쇠를 빼내고 철문을 연다. 불을 켠다. 깜박이는 형광등 사이로 낯익은 형체가 보인다. 어느새 그녀가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있다.

“수고했어.” 그녀가 씩 웃으며 말한다. 나도 마주 웃는다.

“오늘은 안 돼. 나 오늘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 내 생일 때문에 모이는 거라 꼭 가야 하는 자리야.”

그녀의 고집은 남다른 데가 있어서 나는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 재빨리 못 박는다.

“너희는 설마 시험시간표까지 맞춘 거니? 적당히 좀 해라. 뭐, 어쩔 수 없지. J는 방학 끝나고 다음 학기에나 보겠네.”

여전히 나를 떠보려는 듯 말을 맺지만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선다. 나는 안도하며 나갈 채비를 한다. 친구들과의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질끈 묶었던 머리를 풀고 남색 추리닝 바지 대신 청바지를 입는다. 티셔츠가 구겨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한다. 어깨에 붙어있는 머리카락 한 올을 가볍게 집어내고 하나뿐인 검정색 게스 인조가죽 가방을 챙긴다. 전공책도 넉넉히 들어갈 만한 가방에는 지갑과 휴대전화, 조금이나마 허전함을 면해보고자 넣은 읽지도 않을 소설책 한 권이 들어있다.

“이건?”

그녀가 화장품 가방을 흔들며 말한다. 나는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기숙사 문을 연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먼저 방을 나선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길.” 붉은 입술을 끌어당기며 그녀가 말한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추어 나갔는데 친구들은 모두 나와 있다. 다들 조금 기다렸는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른다. 맨발에 여름 구두다. 뚫린 앞코 사이로 색색의 발톱이 살짝 보인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언제 산 것인지 처음 보는 색깔들이다. 오늘을 위해 미리 장만한 게 분명하다. 그와 대조적으로 겨울바람에 하얗게 질린 익숙한 맨 얼굴이 보인다. 나는 갑자기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갑자기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뱃속 깊은 곳에서 기어 나온 벌레가 꾸물꾸물 입가까지 올라와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린다. 이건 그녀가 나를 볼 때마다 늘 뜻 모를 미소를 짓는 것과 같은 이유다.

“내가 괜찮은 바 알아놨는데, 가볼래?”

웃음 끝에 나는 충동적으로 내뱉는다.

 

J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실망했기 때문인지 혹은, 안심했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여기 괜찮다.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민경아?”

친구들이 다투어 물어온다. 하나같이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있다. 호기심 뒤로 느껴지는 뭉툭한 적의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생일 파티 한다니까 동아리 선배가 알려줬어. 아니면 내가 이런 데를 어떻게 알겠니.”

“에이, 시시하게.”

친구들이 관심을 돌려 주문을 한다.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진다. 그때, 가게 문이 천천히 열린다. 그가 들어온다.

그가 걸어 들어온다. 밝은 노란색 머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많이 자라 검은 머리가 반이다. 오늘도 가게까지 걸어왔는지 구깃구깃한 주황색 티셔츠의 가슴 부분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그의 눈이 나와 마주친다.

“화장 안 해도 예쁘네?”

그가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주변이 어수선해진다.

“아는 사람이야, 민경아?”

“에이, 설마.”

“그렇지? 저런 애랑.”

친구들이 조심스레 속삭인다.

 

“아, 이름이 민경이구나!”

아니다. 민경이 아니다. 그러나 입술은 움직이지 못한다.

 

“내 이름도 알려줄게. 나 사실 오늘 휴무인데 왠지 가게에 오고 싶더라고. 일찍 자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뭔가 느낌이 팍 오는 거야! 역시 M 아니, 민경을 만나려고…….”

J는 평소와 다르게 말을 그치지 않는다. 그 답지 않게 횡설수설한다. 친구들의 웅성임이 커진다. 나는 하얗게 질린 채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다. 그는 어느새 내 앞에 서있다. 잠시 숨을 고른다.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가씨?” 언제나처럼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걸어온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민경은 입을 다문다.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가씨? 저는 현진원이라고 합니다.” J는 다시 한 번 나지막이 물어 온다.

 

“우리 그런 애들 아니에요.”

 

그의 낯선 말투에 너는 그를 수상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 듯, 새된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내 손을 잡아끈다. 나를 보호하듯 가두며 서서 가방을 챙긴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그가 나를 본다. 눈빛이 간절하다. 너희 중 누군가가 재촉하듯 내 손을 당긴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잠깐, 거기서.”

 

그녀다.

 

“넌 나가지 않을 거야. 우리를 배신할 수 없잖아. 그렇지?”

붉은 입술을 열어 주문을 걸듯이 나른하게 말한다. 내 손을 잡아끌고 J에게 다가간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에게 J가 눈짓으로 인사한다. 그녀도 입술을 당겨 화사하게 웃으며 답한다.

 

“너, 누구야?”

 

너희 중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우린, 이런 사이야.”

그녀가 내 턱을 살짝 들고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새빨간 입술을 벌려 내 입술에 가져다댄다.

 

주위가 조용하다. 이건, 두려움이다. 침묵이 차갑게 살을 저며 오는 느낌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눈앞에는 여전히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그녀의 눈이 보인다. 공포에 질려 나를 바라보는 너희의 얼굴도 보인다. 떨리는 너희의 눈동자가 보인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그녀의 입술을 세게 깨문다. 피가 뚝뚝 떨어져 내 입술을 물들인다. 턱을 타고 흐른다. 선명한 핏줄기 뒤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하다. 그녀의 형체 없는 비명이 조용한 재즈 바를 흐른다.

 

“민경아, 너 입술에 피!”

누군가가 외치며 내 손을 잡아끌고 가게 밖으로 나간다. 택시를 잡아탄다. 창문 너머 J가 굳은 얼굴로 나를 본다. 그의 뒤에서 떨고 있는 그녀는 이제 모습조차 아련하다.

 

“카이스트 동측 기숙사로 가주세요.”

 

택시가 떠난다. 멀어지는 불빛을 등지고 흐물흐물 늘어지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너희 손에 이끌려 나는 돌아간다. 기숙사로, 우리 속으로, 저 거대한 구두 속으로. 문이 닫힌다. 방 안에는 진한 피 냄새가, 입술은 아직 붉다. 그녀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녀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 내안에 샤넬 217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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