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당선작 / 문화기술대학원 석사과정 김민혜

이 글은 2010년 9월 10일, 하반기 취업을 위해서 노트에 끼적였던 자소서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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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 김 윤 영(金華盈)

   가난한 신혼이었던 엄마는 어린 나를 안고 광주 고가 다리 밑에 사는 점쟁이를 찾아갔다고 한다. 엄마를 보자마자 점쟁이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갑자기 큰절을 했단다. 장차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귀한 아이이니 잘 키워야 한다며. 점쟁이 할머니를 앞에 두고 엄마는 딸기가 주렁주렁 열린 밭에 황금색 큰 뱀이 나와서 딸기를 따먹다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며 맞장구를 쳤더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 할망구에게 외할머니가 생활비에 쓰라며 몰래 챙겨준 돈 10만원을 봉투에서 꺼내 그대로 주고 왔다고 한다. 

  그 이후로 강윤영, 박윤영, 이윤영 등등 살면서 마주친 수많은 윤영이들을 볼 때마다 상상을 한다. 봉사 점쟁이 할머니 서랍에 십 만원씩 차곡차곡 쌓이는 상상. 띠리링, 찰칵. 

   빛날 윤(華)에 찰 영(盈). 

   보이지 않는 눈을 눈꺼풀 밑으로 데굴데굴 굴려가며 봉사 할망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빛이 가득 찬 아이. 대한민국을 빛으로 가득하게 채울 아이. 뵈는 게 없는 할망구가 ‘빚’을 ‘빛’으로 봤는지도. 이름이 ‘빛날’ 윤이 아니라 ‘빚낼’ 윤이 아니었을까. 빛이 가득 찬 아이가 아니라 빚이 가득 찰 아이였을까. 엄마가 꾼 태몽에서 나는 황금빛 뱀이 아니라 먹혀버린 딸기였을지도 모른다. 

   아, 그나저나 이번 달 카드값은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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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 : 만 26세

한국 사회에서 나는 여자이기에- 한 살이라도 어려 보여야 된다. 미국이 좋진 않지만 어쨌든, 미국 나이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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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환경에 대하여 50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엄마는 왜 아빠에게 시집갔어?
  이십여 년 간 엄마의 대답은 매번 달라졌다. 초등학생인 내 머리카락을 땋아주며 엄마는 분명, 엄마랑 아빠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말했다. 이 질문에 대한 엄마의 강한 확신은 엄마의 주름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리고 어느 샌가 한숨과 푸념으로, 나만은 꼭 집안 좋고 능력 있는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강조와 기대감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시집이나 가라던 외할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자도 배울 권리가 있다며 서울로 대학을 온, 엄마는 그 시절의 신여성이었다. 여고시절 똑똑하고 야무져 학급 반장을 도맡았다던 모범생 엄마는 대학에 오자마자 아빠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과방에서 여자 선후배들에게 둘러싸여 통기타를 치며 민중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아빠는 지금껏 엄마가 보지 못했던 자유분방한 나쁜 남자였다. 엄마의 마음을 알면서도 가장 예쁜 여자 후배와 가까이 지내고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도록, 하이에나처럼 천천히 때를 보아가면서 말이다. 

   국문과 첫 엠티였다고 했다. 대성리로 갔다던가. 선배 후배 여자 남자 교수 학생 구분 없이 모두가 뒤엉켜 왁자지껄 까르르르. 그 소란스러운 틈 속에서 태어나 처음 마셔보는 소주 한 잔에 엄마는 얼굴이 발그레져 있었다. 술 취했냐며,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오자며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빠였다. 

  둘은 안개 낀 대성리의 개울가를 걸었다. 별이 무척 반짝였다고 한다. 조금 멀리 왔음직한 곳에 아빠가 손수건을 깔아주었다. 강 건너로 나지막한 언덕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엄격했던 외할아버지로부터, 친구들과의 치열한 시험 경쟁으로부터, 자신에게 늘 바르고 얌전하기만은 바라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곳. 고전문학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있다면 바로 그 곳이었을 거라고 했다. 엄마는 앙큼하게 아빠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그게, 

  엄마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가난한 두 청춘 남녀는 자취방에서 뜨겁게 사랑했다. 월세 8 만 원짜리 반지하방에서 덜컥, 내가 생겼다. 엄마는 휴학했다. 그 때 처음으로 아빠와의 사랑이 마치 유치장이라도 가야하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저 햇빛이 들어오는 먼지 낀 반지하방에서 불러오는 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쓰다듬었다고 했다. 방 안에는 선배 형이 군대 가면서 주고 간 고물 텔레비전 하나가 있었는데, 그걸 보는 게 엄마에게 유일한 행복이었다. 아빠는 학교를 다니면서 학원 아르바이트와 간간이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교사가 되어 대한민국의 여성 교육을 주도하겠다던 엄마는, 막장 드라마에 푹 빠진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저 놈이 저 여자랑 바람이 났는데, 저 여자는 원래 저 놈의 남편의 마누라와 어릴 때 함께 자란 자매 같은 사이고. 저 여자가 제 엄마처럼 심성이 못돼 먹어서 저런 행동을 한다며 빨리 저 놈 저 년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아침저녁으로 날 붙잡고 연기만 잘하는 죄 없는 배우들을 이리저리 손가락질해댄다. 이게 엄마의 하루다.  

   기타를 매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소설을 쓰겠다던 아빠는 서론, 본론, 결론, 1200자 이내 글쓰기와 맞춤법 교정에 익숙해진 동네 작은 학원의 논술 선생님이 됐다. 새벽 두 시쯤 되어야 들어오시고, 아침 내내 주무신다. 남들은 평생에 한두 번 있을 법한, 대학 합격 전까지의 고도의 긴장감을 해마다 반복한다. 소설가가 아니라 고 3 수험생이다.  

  아, 이 가정사를 어떻게 500자로 정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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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및 특기 : …
 
  취미, 특기. 이 빈 공간을 무엇으로 메워야 할까. 누구나 취미가 있고 누구나 특기가 있어야 하는 걸까. 나에겐 꾸준히 한 것도, 잘 하는 것도 없다. 

  중학교 때는 아이돌 스타를 보고 엄마를 졸라 방송 댄스 스쿨을 등록했었다. 학교에서 야영 캠프를 갈 때 간들어지게 허리를 돌리며 웨이브를 춰 주목받고 싶었다. 한 달 동안 학원에서 스트레칭만 하고 거울 보며 허우적대다가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그 땐 인기 아이돌이 수영 선수로 나오는 TV 드라마가 한창 인기였다. 수영장을 등록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물살을 가르며 멋지게 수영을 하고 싶었다. 마치 그녀처럼 수영을 하게 되면, 잘생기고 몸도 좋고 집도 부자인 그러나 싸가지 없는 남자와 우연히 수영장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한 달 간 첨벙첨벙 동네 아주머니들이랑 판을 잡고 물장구만 쳤다. 다리도 아프고 팔도 아팠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니 점점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졌다. 인터넷에 올려 수강권을 팔아 버렸다. 

  대학교 때는 고 3 시절 찐 살을 빼기 위해 요가 학원을 등록했다. 요가로 S라인을 관리한다는 30대 여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자극을 받아 맞지도 않는 청바지를 사서 방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정말 독한 마음을 먹고 하려고 했으나, 느릿한 요가는 너무 졸렸다.

  요즘엔 아빠가 젊은 시절 썼다던 어설픈 단편 소설들을 보고 나도 글이나 한 번 써볼까 해서 노트와 예쁜 볼펜을 샀지만 두 장도 채 쓰지 못하고 있다. 

  결국, 내 취미는 취미 바꾸기다.
  취미가 이 모양이니 특기가 있을 리가. 제 취미는 취미 바꾸기인데, 이렇게 자주 바꿀 수 있는 게 제 특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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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과 그 경험이 나에게 미친 영향을 서술하시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의 긴 교육과정을 견뎌내며 버틴 건 대학생이 되면 정말 해방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긴 레이스 끝에 나름대로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고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정말 모든 게 바뀌었다.
  등하교 시간이 없고 담임선생님도 없어졌다.
  심지어 몇몇 친구들은 얼굴도 바뀌었다.
  나는 위 하나가 늘었다. 

  6시 쯤 학교 정문에서 모여 생고기를 구우며 선배들과 소주 한 잔을 붓고, 9시 쯤 맥주로 2차를, 12시 쯤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하숙집의 텅 빈 방이 싫어 사람들과 함께 3차, 4차, 5차, 나의 두 번째 위가 술로 빵빵해질 즘이면 그제야 얼큰하게 취해 얼굴이 붉어졌다. 동이 트면 쓰린 속을 풀어줄 해장국을 밀어 넣고 방에 들어갔다. 그런 날들이 365일 지났다. 2학년이 되었다.
  2학년 때는 선배가 되어 후배들과 함께, 그렇게 1년을 보냈다. 

  3학년이 되었다.
  선택은 하나, 휴학. 스타벅스 커피를 손을 들고 숄을 두르고 뉴욕 한 복판을 또깍또깍 걷는 상상을 하며 6개월 간 편의점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적당히 모은 비자금을 숨겨놓고 부모님께 어학연수를 보내달라며 졸랐다. 요즘엔 영어는 필수라며 어학연수의 필요성을 조목조목 말했다. 엄마는 모아놓은 비자금과 붓고 있던 적금을 해지하고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그 돈을 들고 어학연수 센터를 가니 필리핀의 한 기숙학원을 추천해 주었다. 

  어찌 되었든, 필리핀에서 6개월은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피부색이 다른 필리핀인이 ‘웰껌 투 퓔리퓐’하며 아카시아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수능용 영어 문법을 짜내며 더듬더듬 영어로 말했다.  

  필리핀식 발음을 듣는 게 익숙해져 갈 때쯤 나는 이국적인 풍경에도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 무렵, 약간의 고독이 찾아왔다. 눈은 필리핀에 익숙해졌지만 혓바닥은 점점 굳어갔다. 영어는 늘지도 않는데 한국어 쓸 은 적으니 졸지에 말없는 아이가 되었다. 새로움 없는, 반복적인 타국에서의 일상은 극심한 고독 그 자체였다. 

  그 때, 그가 나타났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나처럼 설레임 반 두려움 반을 눈동자에 담은 채. 얼마 지나자 그의 눈빛에도 고독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우리는 두어 번 식사를 하고 타국에서 남매처럼 친해졌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바다를 보러가자고 했다. 모래사장에는 코코넛 열매를 매단 야자수들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기울어져 있고 그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레 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입을 맞췄다. 

  그는 기숙사를 나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렌탈 하우스에서 살았다. 손바닥만 한 도마뱀이 슬금슬금 돌아다니던 그 방은 우리의 집이 되었다. 함께 자고 함께 학원에 갔다. 수업이 끝나면 둘이서 시장에서 과일을 잔뜩 사와서 먹었다. 엄마가 한 번씩 깻잎이나 장조림, 컵라면 따위의 한국 음식들을 보내주면 둘 만의 간소한 파티를 열었다. 그가 아픈 날, 엄마가 보내준 쌀과 참치 캔으로 죽을 끓여서 먹여주었다. 아픈 그에게 내 무릎을 내어주고, 알아듣지 못하는 잔잔한 팝 발라드를 틀어놓고 그를 토닥이며 아기처럼 재웠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했다. 그냥 이대로 그와 결혼해서 필리핀에서 살고 싶었다.   장난삼아 서로에게 여기서 그냥 살까라는 식으로 말이 오고갔는데, 어느 날부터 그가 취업 센터를 들락거렸다. 

  덜컥, 겁이 났다. 특히 그가 내민 등록금이 싼 필리핀 대학원 홍보지나 이상한 아르바이트 정보지를 보면,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딸, 꼭 집안 좋고 능력 있는 남자 만나야 한다. 엄마가 며칠 전에 이모랑 사주를 보고 왔는데, 우리 딸은 의사를 만나서 결혼한다고 했어. 우리 딸은 정말 결혼 잘할 거야. 엄마의 말들이 주위를 맴돌았다. 

  뉴욕이 아닌, 고작 필리핀으로밖에 어학연수 올 수밖에 없는 남자, 면세점에서 명품백 하나 내게 떡하니 선물하지 못하는 남자, 겨우 돈을 모아서 면세점에서 중복 할인받아 벨트 하나 사고 뿌듯해하는 남자, 그나마 용돈이 떨어져가는 월말에는 과일 하나 사면서 궁색하게 때 묻은 필리핀 돈 낱장을 하나하나 세며 내 눈치를 보는 남자, 이게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나처럼 하반기 취업원서를 한 칸 한 칸 채우고 있을까. 우리의 추억은 이제 ‘필리핀 어학연수 6개월’란 한 줄의 이력이 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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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지원하려는 이유와 회사가 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쓰시오. 

  이 곳은 저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열정과 패기로 회사 발전에 이바지 하겠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말들을 쓰고 싶지만 그랬다간 키보드를 두들기는 손가락에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다. 

  꿈. 열정. 패기. 

  이 세 가지만으로 팔팔 끓던 때가 있었다. 
  그건 작년 여름, 국문과 선배를 통해 하게 된 방송작가 일을 하게 됐을 때였다. 취업 실패로 한 마리의 백조가 되어 방 안을 떠다니고 있을 때, 모 케이블 방송국 작가가 된 한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나름대로 글 좀 쓴다고 유명했던 선배였다. 자기가 맡고 있는 쇼 프로그램에 새끼 작가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였다. 마침 할 일도 없고 해서 간단한 이력서를 제출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새끼 작가는 정말 그냥 ‘새끼’였다. 야 이 새끼야 아직도 섭외를 못 한 거야? 아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이 새끼야. 김수현처럼 저명한 드라마 작가를 꿈꾸던 나는 백조에서 한 마리의 새 새끼가 되어, 이리저리 방송에 출연할 일반인을 섭외하기 위해 보험 판매원처럼 굽실굽실하고 무대 세팅 전에 휘날리는 잔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었다. 나의 꿈과 열정과 패기가 전화 통화료와 교통비로 흡수되어버리고 영혼 잃은 해골처럼 삐걱삐걱 걸어 다녔다. 명색이 방송 작가인데 글은 한 번도 쓰지 못했다. 보수도 적었다. 그 돈으로는 아무것도 월급으로 생색 낼 수 없었다. 그나마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유명 연예인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친구들한테 마치 그들과 단짝 친구라도 된 양 떠드는 게 유일하게 방송국에서 일하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방송국에서는 매일 회식이 있었다. 제일 막내라는 이유로 늘 연거푸 맥주를 들이켜야 했는데,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1kg이 불어 있었다. 나날이 불어가는 뱃살과 엉덩이와 허벅지 살을 보며 더 스트레스를 받고 그 스트레스를 또 다시 먹는 걸로 풀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뫼비우스 띠 안에서 나는 먹고 마시고 또 먹고 계속 먹었다. 

  폭탄주를 진탕 마신 날, 나는 계속 먹는데 똥을 누지 못해 결국에는 펑, 터지는 꿈을 꿨다. 미처 소화되지 못한 채 끄집어져 나온 씹다 만 소시지, 찌부러진 황도, 뻥튀기 찌꺼기가 내 창자들과 얼크러져 바닥에 흥건하게 깔렸다. 그 안에서 몇 개의 십 원짜리가 또르르르- 굴러 나왔다.  

  그 날, 나는 무단결근했다. 휴대폰도 꺼 두었다. 방 안에 퉁퉁 불어 누워있었다. 섭외 전화를 해야 할 사람들 수와 스케줄 확인해야 하는 출연자들이 생각이 났다. 전화를 붙잡고 쩔쩔매고 있을 선배와 그 선배에게 또 이 새끼야 저 새끼야 새끼새끼하고 있을 메인작가와 그 메인 작가에게 이년아 저년아 하고 있을 PD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하지만 다 잊고 잠을 자기로 했다. 다음 날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집 밥을 먹기 시작하니 다시 살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계속 사주를 보러 다녔다. 올 해가 취업 운이 좋은 해라며 위로 섞인 응원을 해주셨다. 사실 그마저도 부담이었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다독여 줄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함께 음식점이나 카페에 갈 돈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입을 옷도 없었다. 세련된 커리어 우먼이 되어난 친구들이 그들끼리 회사의 동향을 이야기하는데 공감할 수 없었다. 일찍 결혼 잘한 똑똑한 친구들은 정기적인 피부 관리로 뽀송해진 얼굴로 남편이 안겨준 명품백을 들고 ‘나 사랑받고 있어요’란 표정으로 나타나면, 난 살쪄서 볼품없어진 내 몸과 대학 때부터 신어서 낡아진 내 구두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리에만 나가면 오히려 더 많은 돈을 썼다. 이번 달 날아올 영수증 금액을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카드를 긁었다. 
 
 자존심을 위해서. 열심히 쓴 카드빚을 갚기 위해서. 올해는 꼭 어디든지 입사해야합니다.
 
  이만큼 강력한 회사 지원 동기가 있을까. 그래도 서울 소재 대학 졸업, 어학연수 6개월, 토익 880점이면 나쁘지는 않은데. 게다가 올해는 취업운도 있을 거라니깐 기대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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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입사 후 앞으로의 포부를 서술하시오.

  통장에 100만원씩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백화점에 갈 거다. 할인 코너가 아닌 매장에서 우아하게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사고, 그 옷에 어울리는 구두도 한 켤레 사 신고. 버스가 아니라 택시를 타고, 한강이 보이는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에 스테이크를 먹을 거다. 

  그래도 우선 첫 월급은 엄마 선물 사는데 쓰고 싶다. 요즘엔 대학생들도 들고 다니는, 그 놈의 루이비통. 진짜 명품 가방 하나 빳빳한 케이스에 담아 엄마에게 선물해야지. 다시는 가짜 가방 들고 동창회 갔다가 똑같은 가방 들고 온 친구를 보고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일이 없으시도록 말이다. 

  반짝거리는 신형 자동차를 사고 할부금 빼고 남은 돈으로 적금을 부어서 천만 원 종자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주식도 조금 하고 적립식 펀드로 계속 불려나가야지. 그래서 더 큰 목돈이 생기면 서울에 부동산을 사야지. 그 부동산에서 나오는 돈으로 노후 용돈을 마련하고. 오, 이 만큼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포부가 있을까.

  사실 나에게는 돈 모으기 말고도 진짜 원대한 포부가 있다. 피부랑 몸매 관리도 받고 스스로를 잘 가꿔서, 성격도 좋고 집안도 좋고 능력도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래서 내 딸만큼은 정말 하고 싶은 모든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풍족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클 수 있도록 말이다.

  토익 점수에 빌빌대지 않고 괜히 혀 꼬는 발음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영어를 말하고, 사람들이 영어 잘한다고 부러워하면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거든요, 2년 정도. 내 딸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아니다, 어릴 때 미국으로 보내서 영어를 배우는 게 나을까. 아니다, 아예 원정출산을 가서 국적 두 개랑 이름 두 개를 주자. 이제 영어는 권력이니깐.

  악기도 시킬 거다. 피아노처럼 흔한 거 말고 개인 레슨을 받아야 하는 플루트나 첼로 같은 악기.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아쟁이나 가야금도 좋을 거 같다. 

  취미 생활로 하면서 잘사는 집 아이들과 놀면서 친해질 수 있게 보드도 배우게 할 거다. 메이커 있는 외국 보드복과 보드 세트를 사 줄 거다. 나중에 자소서에 ‘취미’나 ‘특기’란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게 말이다.
 
  내 딸은, 정말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멋진 사람으로 키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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