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예원 기자
오예원 기자

 

 

 

본지는 지난 호(514호)에서 출판 번역에 대해 알아보았다. (관련기사 본지 514호, 「문화를 공유하는 징검다리, 번역」) 이번 호에서는 영상 번역의 특성과 출판 번역과의 차이점에 대해 들여다본다.  또한, 자막을 쓸 때 도움이 될 실전 조언과 자연스러운 번역을 위한 번역가의 고민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영상 번역이 쓰인 과정을 이해한다면, 자막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뜻밖의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출판 번역과의 차이 - 시공간의 제약

영상 번역은 출판 번역과 형식부터 환경까지 많은 요소가 다르다. 우선, 번역 기간에 차이가 있다. 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는 1~3개월이 걸리지만, 영상 번역은 대체로 기간이 짧다. 영화는 일주일, 드라마는 하루 이틀 내로 한 편을 끝내는 경우가 많다. 또한, 모든 번역서에 번역가의 프로필과 이름이 올라가는 출판 번역과는 달리, 극장과 영화제 상영작을 제외한 영상 번역은 대부분 익명에 가려져 있다. 그렇다면 한 번역가가 출판 번역과 영상 번역을 함께 할 수 있을까? 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각각이 가진 특징이 달라 따로 공부가 필요하다. 두 줄짜리 자막으로 어떻게 압축할지를 고민하는 영상 번역과, 문장 부호 하나도 함부로 생략하면 안 되는 출판 번역은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영상 번역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몇 번씩 반복할 수도, 천천히 읽거나 빨리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경우, 스크린 위의 자막이 몇 초 안에 사라지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 안에 자막을 다 읽어야 한다. 다 읽지 못했거나, 이해가 되지 않았더라도 다시 볼 수 없다. 또한, 공간의 제약이 있다. 출판 번역은 몇 장 이내로 써야 한다는 제약이 크게 없지만, 자막은 스크린 하단에만 삽입할 수 있다. 따라서 글자 수 제한이 생긴다. 5초 안에 시청자가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스크린 전체를 뒤덮지 않도록 짧은 문장을 써야 한다. 이렇게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의미를 압축하고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 원문을 훼손하거나 왜곡한다는 질타를 받기도 한다. 아무리 멋있고 근사한 표현을 생각해내도 글자 수가 넘치면 과감하게 문장을 가지치기해야 한다. 자막이 몇 초간 보이는지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영상 번역가는 편집 능력도 갖춰야 한다. 

글자 수는 대체로 자막 한 줄에 공백 포함 16자까지 허용한다. 자막은 최대 두 줄을 쓸 수 있는데, 문장 부호는 반 글자로 계산한다. 자막 한 줄에 16자가 넘으면 줄 바꿈을 해서 두 줄로 만든다. 이때 원칙이 있는데, 구절 단위로 나눠서 줄 바꿈을 해야 하고,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은 함께 붙여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문장부호가 한 줄에 두 개 이상이 되면 줄 바꿈을 한다. 예시로 “새빨간/장미가 금방 시들었다” 보다는 “새빨간 장미가/금방 시들었다”, “아저씨, 잠깐만요, 기다리세요” 보다는 “아저씨, 잠깐만요/기다리세요”처럼 의미 단위로 나누어야 읽기도 쉽고, 보기에도 깔끔하다. 글자 수가 16자가 넘지 않아도 자막을 두 줄로 만드는 것이 좋다. 한 줄의 길이가 길면 시선을 좌우로 많이 움직여야 하지만, 두 줄로 만들면 길이가 짧아져 문장이 한눈에 들어와 금방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영상 번역의 두 가지 길, 더빙과 자막

케이블 채널이 등장하기 전, 지상파에서 방송되는 외화는 전부 더빙 번역이었다. 케이블 채널이 등장하며 자막 방송의 비중이 커졌지만, 요즘도 지상파에서 방송되는 외화 프로그램과,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은 대부분 더빙으로 제작된다. 더빙의 장점은 자막을 읽을 필요가 없어 영상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막을 읽으려다 장면을 놓치는 상황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더빙과 자막 번역은 기법과 형식에서 차이가 나는데, 더빙은 자막에 비해 글자 수 제약을 덜 받는다. 즉, 내용을 압축하거나 생략할 필요가 없다. 만화나 드라마 더빙 번역은, 극 중 배우의 입 모양이 보여 성우의 말하는 속도가 배우와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또한, 자막 번역보다 좀 더 구어체에 가까운 표현을 쓰고, 감탄사와 호흡까지 옮겨주어야 한다. 더빙 번역은 맞춤법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자막 번역은 맞춤법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 예시로, 더빙은 “왜 그래, 대체?/제정신이야, 지금?”처럼 번역한다면, 자막은 “대체 왜 그래?/지금 제정신이야?”와 같이 번역한다. 더빙 번역은 실생활처럼 부사와 서술어 순서를 바꾸는 등 도치된 문장을 많이 사용하지만, 자막 번역에서 도치된 문장을 사용하면 쉼표가 들어가 글자 수가 늘어나고 보기에 깔끔하지 않다. 나아가 더빙은 “엥?”, “앗”과 같은 감탄사나 의성어도 옮기지만, 자막 번역은 옮기지 않는다. 
 

보기 편한 자막을 위한 실전 조언

<영상번역가로 산다는 것>의 작가 함혜숙은 영상 번역을 할 때 실전 조언 몇 가지를 전했다. 먼저, 순서대로 번역하는 것이다. 영어와 한국어의 어순은 다른데 영상 번역의 경우, 영어 어순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극중 인물이 말하는 대사와 자막 내용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I am going to Seoul at 7 p.m.”을 한국어 어순대로 번역하면, “나는 저녁 7시에 서울에 갈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인물이 대사를 2초 안에 말할 경우, 이렇게 한국어 어순대로 자연스럽게 옮길 수 있다. 하지만, 말을 뜸 들이며 천천히 말할 경우, 자막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이럴 때는 “나 가야 해”, “서울에”, “저녁 7시에 말이야”라는 식으로 번역해 극적 긴장감을 그대로 살려줄 수 있다. 

또한, 영상 번역은 글자 수를 줄일수록 좋기에 한 글자 한 글자가 중요하다.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글자 수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 우선, 한국어는 주어와 목적어가 없어도 의미가 잘 통하기 때문에, 주어와 목적어를 생략해도 자연스럽다. 내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생략하는 것이 좋다. 감탄사와 의미 없는 말도 생략한다. 일단 자막이 뜨면 자연스럽게 자막에 눈길이 가기에, 내용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짧은 문장은 생략하는 것이 좋다. “Ok”, “Hi”, “All right” 등은 자막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영어는 수동문이 많은데, 우리말은 능동문을 더 많이 사용한다. 수동문 영어 문장을 능동문으로 번역하면 더 자연스럽고 글자 수도 줄어든다. 예를 들면,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보다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기술이 발전되었다” 보다는 “기술이 발전했다”가 좋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영상 번역가 또한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고민한다. 번역가의 모범적인 자세로 자주 인용되는 니콜라이 고골의 “유리가 없다고 착각할 정도로 한없이 투명한 유리가 되기”라는 말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번역가가 자연스러운 의역을 해 외국어과 모국어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유리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과, 번역가의 색이 들어가지 않고 원문의 단어와 표현을 투명하게 살려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원문의 문화적 낯섦을 최소화하고, 후자는 낯섦을 유지한다. 둘 중에 정답은 없으나, 영상 번역에서는 전자가 더 적합하다. 자막은 글이 아닌 말이기 때문에 낯섦이 순간적인 이해에 방해가 된다. 시청자들이 외화를 보는 이유는 문화적 낯섦을 배우기 위해서라기보다 등장인물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이야기를 즐기기 위해서이다. 즉, 자막의 기능은 많은 사람들이 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직역을 통해 원문을 그대로 살리려다 등장인물의 특성을 제대로 담지 못할 수 있다. 살아있는 인물에 살아있는 말을 얹기 위해선 의역이 필요하다. 


자막에서 드러나는 번역가의 존재감

관객이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원문을 모국어처럼 읽히게 하기 위해서는 번역가의 색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가 살아온 삶과 가치관, 말투 등이 번역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에 자막에는 번역가의 존재감이 묻어난다. 황석희 번역가는 자막에 번역가의 존재를 없앤다는 것은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 <1917>에서 ‘내가 나이가 많으므로 먼저 가겠다’는 뜻의 대사 “Age before beauty”를 “장유유서지”라고 번역했다. 문장을 직역하면 “미녀보다 노인 먼저”라고 할 수 있고, 여기서 미녀는 젊은 사람을 말한다. 이를 장유유서로 번역한 것은 뜻은 일맥상통하지만, 외국인이 삼강오륜을 안다는 게 되어 황당하기도 하다. 하지만 황 번역가가 유교권 국가에서 자라기도 하였고,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 또한 그러하기에 장유유서라는 표현을 선택했던 것이다. 

 

영상 번역은 시청자가 다른 나라의 영상을 모국어처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막 번역의 경우, 출판 번역과는 달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어 글자 수 제한이 엄격하다. 자막 외에도 더빙 번역을 통해 시청자가 영상에 더욱 집중하게 할 수도 있다. 주로 의역의 원칙을 따르는 영상 번역은 번역가의 삶을 투영한 창조물이기에 번역가만의 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 황석희 번역가는 이렇게 말했다. “자막은 번역가가 사는 집이다. 궁색한 번역가를 내쫓아 봐야 남는 건 온기 없이 텅 빈 건물뿐이다.”

 

오예원 기자
오예원 기자

 

 

참고문헌 |
「영상번역가로 산다는 것」, 함혜숙, 더라인북스(2017)
「번역가의 개입은 어디까지 허락되는가」, 황석희, 월간 채널예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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