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우리 학교 학우들은 사회에 무관심하고 학업에만 열중한다는 비판을 외부로부터 많이 받아 왔다. 하지만 학생 사회가 항상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우리 학교의 학생 사회 역사를 살펴본다

학부 총학생회
학부 총학생회는(이하 총학) 1986년 제1회 학부생 입학과 함께 설립되었다. 총학은 학내에서 학우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학생대표자회의 등을 주관하며 노력해왔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학생자치활동의 대부분을 총학 집행국이 도맡아 했다. 당시 동아리연합회, 생활관자치회 등의 기구들은 실무의 많은 부분을 총학에 의존했다. 그로 인해 학우들 사이에서는 자치단체들이 너무 총학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학우들은 이 같은 체제가 업무를 민주적으로 처리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1990년 제5대 총학은 현재의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의 전신인 학생대표자회의를 신설하고 총학, 여학생회, 과대표 등이 참가해 학우들의 의견을 수렴했으며, 과 조직을 활성화하고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토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한, 12개 학과에서 학번별로 1명씩 선출해 대의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예결산을 심의하고 학생총회발의, 선거관리위원회를 기획하는 등 총학의 활동을 심의, 견제했다.

한편, 총학 선거에 후보가 출마하지 않거나 투표에 참가한 인원이 과반수를 넘기지 못해 비상대책위원회가 임시 기구로 설립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거에 단일후보가 출마하는 일이 잦았다. 이는 학우들의 학내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직까지도 우리 학교 학우들의 한계로 지적받고 있다.

1997년에는 총학과 학우 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탈퇴를 둘러싸고 대립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다. 총학은 전체학생투표를 통해 한총련 탈퇴하기로 했으나, 대전지역 총련 출범식에 참여하고 한총련의 정치적 입장을 그대로 취한 자보를 배포했다. 이에 대해 학우들이 강하게 비판하자, 총학은 탈퇴서류를 제출할 당시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아 한총련을 탈퇴한 것이 아니며, 앞으로 한총련의 참모습을 보여 학우들을 설득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총학은 학우들의 외면을 받고 말았다.

 

학생운동
8,90년대, 학우들은 어두웠던 군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1988년에는 전방 입소교육을 떠난 60명의 학우가 자진 퇴소한 사건이 있었다. 60명의 학우는 전방 에 입소하기로 되어있었으나 이들은 입소교육이 자율권을 침해하고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키운다는 이유로 자진퇴소를 결정했다.

또한, 1989년 학우들은 학칙개정준비위원회(이하 학준위)를 설립했다. 학준위는 비민주적 학생회칙을 개정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학사경고제, 징계제도 등을 논의했다.

1990년 4월 말부터 총학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학우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자보를 붙이고 5월 1일 노동절에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집회 후에는 과별 토론회를 열고 동맹휴업을 결의했다. 또한, 충남대학교 정문에 모여 시위를 벌이며 민주화 의지를 표명했다. 결국, 총학 간부 4명은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으나 이에 물러서지 않고 전체 학생 투표를 시행해 학우들의 의견을 모았다. 학우들은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징계 철회를 요구하였다. 결국, 학교 측과 총학은 학교 측에서 학우와의 시각차를 무리하게 탄압한 것에 사과하는 글을 보내고, 총학은 학교에 시위에 대한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은 과실을 인정하고 사과문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 1990년 5월 9일, 700여명의 우리 학교 학우들이 충남대학교 정문 앞에 모여 민주화 투쟁 시위를 벌였다

동아리
우리 학교 개교 이래, 학부 동아리는 그 수와 다양성이 꾸준히 성장해 1988년에는 이미 33개의 동아리가 서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서로 개별적이고 분리된 성격을 띠던 동아리들은 1991년 제1대 동아리연합회(이하 동연)가 발대하면서 상호 협력의 틀을 구축했다. 초대 동연은 39개의 동아리 대표들을 모아 동아리 대표자 회의를 열어 분과와 운영위원회를 건설하고 올바른 학내 문화 선도를 계획하며 기틀을 마련했다.

동아리 수가 증가하면서 동연은 단순히 예산과 동아리방을 지원해주는 역할에서 나아가 동아리간의 권익을 보장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동아리 문화제', ‘동아리 소개의 밤'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동아리 간의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를 가졌다. 지난 2009년과 2010년에는 각각 천안함 사태, 신종플루 대란으로 동아리 문화제가 열리지 못했다. 동연은 올해 가을학기부터 그 명맥을 다시 잇기 위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여학생회
여학생회는 이공계 대학이라는 우리 학교의 특성상 학내 소수 구성원인 여학우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복지를 함양하기 위해 힘썼다.

여학생회의 대표적인 활동은 여학우의 인권 신장 운동이었다. 1988년 11월, 생활관 나동과 다동의 사감과 전기기사들이 학우들에게 통보 없이 여학생 기숙사 방에 들어가 전열기구 일체를 거둬가자 여학생회는 자율권을 침해했다며 학교 측에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축제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Miss KAIST'를 중단시킨 사건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미스코리아와 같은 취지로 열린 대회였는데 여학생회는 여성의 상품화를 조장한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프로그램을 중단시켰다.

또한, 교내에 여성의 인권을 강조하는 자보를 붙이고 ‘꼭두바람’이라는 여학생회지를 발간하는 등 여학우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여론을 조성하는데 이바지했다.

여학생만을 위한 여러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평소 체육 활동에서 소외되었던 여학우를 위해 ‘여학생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 밖에 ‘여성문제 연구주간’을 정해 여성의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를 상영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눠보는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 여학생회는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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