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60년대 말부터 계획되어 여러 난관을 겪은 끝에 한국과학원의 창립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어떤 학과를 설치할지, 학생은 어떤 식으로 선발할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한국과학원의 성공여부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있었다. 특별기획 <KAIST 40년, 그리고 미래> 두 번째 기획에서는 이런 구체적인 계획을 위한 한국과학원의 노력에 대해 알아본다

연구와 교육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한국과학원은 이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설립 직후 향후 5년간 한국과학원 발전의 청사진을 담은 <한국과학원 설립 5개년 사업계획서>작성을 시작했다. 이 계획서는 터만 보고서의 내용을 구체화시켜 개교 일정과 규모 확충 계획, 투자 계획, 연구교육 계획 등을 정리했다. 이 계획서의 작성 과정에서, 지금으로 본다면 매우 상식적인 문제가 논란거리로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과학원의 주요 임무를 연구로 할 것인가 교육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한국과학원은 과학기술 고급인력을 양성하는 연구 기관을 표방하며 만들어졌지만, 이는 우리나라에 전례가 없던 형태의 대학원이어서 어떤 방식으로 연구와 교육을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이 서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연구와 교육의 적절한 결합, 기존 연구기관과의 협력 관계 형성 등은 한국과학원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게 되었다.


본격적인 교육의 기틀을 닦다

<한국과학원 설립 5개년 사업계획서>에서는 학생 규모와 개교 일정에 대한 계획도 설정되었다. 기계공학과, 산업공학과, 생물과학과, 수학 및 물리학과, 재료과학과, 전기및전자공학과, 화학및화학공학과 등 7개 학과에 각각 석사 25명, 박사 10명, 전문석사 5명씩 총 280명 정도의 학생 선발 계획이 세워졌다. 전문석사과정은 석사학위를 받고 학교를 떠나 있던 학생들의 재교육을 위한 과정이었으며, 교육 수준은 박사과정과 동등하게 설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투자 규모, 교수충원 계획에 비해 다소 무리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계획은 이후에 수정되어 석사 신입생을 학과당 15명씩 우선 선발하고, 박사과정은 1974년에 개설하되 학과당 5명의 신입생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또, 전문석사과정의 설치는 1977년으로 미루었다.
 

경쟁력있는 학생 확보를 위한 획기적인 특혜조치

교수진 확보와 자금 조달 등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수한 학생의 모집이었다. 한국과학원의 설립이 이공계 학생의 두뇌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던 만큼, 졸업생들의 해외유학 방지 대책도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한국과학원 학생에 대한 여러 가지 특혜조치가 생겨났다.

이 중 가장 중요하고 파격적인 것이 바로 병역특혜조치였다. 당시 강력한 반공이념을 정권의 토대로 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병역은 대한민국 젊은이에게 피할 수 없는 의무였다. 한국과학원 설립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박 전 대통령도 처음에는 병역특례에 대해서만은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설립주도자들의 끊임없는 설득에 결국 입장을 바꿨다.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던 김기형 전 장관은 “당시 영국과 일본에서는 이공계 석사를 하면 징병을 면제하거나 연기해 주었다는 사실을 듣고 내가 직접 박 전 대통령을 찾아가 ‘병역 대상자 400명에 대해 배려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더니 대통령이 고심 끝에 허락했다”라고 회고했다. 한국과학원법에 따르면 한국과학원 학생에게는 10주 이내의 훈련으로 병역을 대체하는 대신 졸업 후 3년간 국내의 기관에서 복무해야 했는데, 이 훈련은 실제로 약 3주 이내에 끝났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부 아래서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던 것이다.

▲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 1971년 4월 14일 한국과학원, 한국개발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가 기공식을 열었다 / 홍보팀 제공

한국과학원 학생들에게는 경제적 혜택도 주어졌다. 한국과학원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학비를 면제받으며, 기숙사를 제공받기로 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한 달에 2~3만원의 장학금을 지급받았는데, 당시 연세대, 고려대 등 사립대학의 등록금이 10만원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한 혜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진정한 이공계 교육을 펼치다

2년여 간의 준비기간을 거친 뒤 1973년 1월 경희대학교에서 한국과학원의 첫 입학시험이 실시되었다. 이날 총 549명의 지원자가 시험에 응시했는데, 이들 모두가 상당히 우수한 학생이어서 당시 한국과학원 원장이었던 박달조 박사는 지원자 모두를 선발할 수는 없겠냐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날 필기시험에서 231명이 선발되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구두시험을 실시해 최종합격자 106명을 선발했다. 1973년 3월 5일, 2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한국과학원의 첫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이러한 조건에 힘입어 한국과학원은 첫 신입생이 입학한 이래 매년 3:1 이상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안정적인 학생 수급에 성공했다. 1970년대 한국과학원 석사과정 합격자의 80%가 서울대학교 출신이었는데, 이는 당시 서울대학교가 한국의 대학가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시 신입생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학부교육을 받고 입학했다 하더라도 이공계 교육에 필수적인 실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교과서 중심의 문제풀이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학생들이었기에 공학도로서의 재교육이 필요했다. 1996년 발행된 우리 학교 역사서 「한국과학기술원 사반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밀도 높고 치열한 한국과학원 생활을 겪으면서 학생들은 입학 당시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바뀌어갔다. 그들은 학문이 무엇인지, 엔지니어란 무엇인지를 경험했다’


한국과학원 학생들, 군 관련기관에 진출

한국과학원 학생들은 졸업 후 기업체, 정부기관, 연구소, 대학 등으로 대거 진출해 각 분야의 고급인력으로 활동했다. 1970년대 석사과정 졸업생 716명 중 연구소로 진출한 학생이 38.7%(277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 중 67명은 국방과학연구소로 진출했다. 그 다음으로 많은 졸업생이 선택한 진로가 기업체였는데, 28.8%(206명)이었다. 정부기관으로의 진출도 8.5%(61명)가 있었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인 38명이 국방부에 자리를 잡았다. 즉, 14.7%(105명)의 학생이 군 관련기관인 국방부와 국방과학연구소로 진출한 것인데, 이는 한국과학원이 군 전문가 양성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격변기 맞아 대덕분원 위기맞아

한국과학원이 5회에 걸쳐서 석사 신입생을 선발하고 졸업생을 3회 배출한 1977년은 발전의 제2단계에 접어든 해였다. <한국과학원 설립 5개년 사업계획>이 1976년 마무리되어 새로운 변화에 대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고, 미국 국제협조처 차관 집행도 1977년 말 종결을 앞두고 있었다. 1977년은 또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해로, 박정희 정부는 이 시기의 중점적인 과제를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의 변화로 설정했다. 그 결과 정부출연연구소들이 대거 설립되어 연구원의 수요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이런 고급인력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대학원은 한국과학원뿐이어서, 이는 한국과학원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의 변화에 <한국과학원 제2차 5개년 계획>을 세우고, 1981년까지 ▲박사과정의 강화, ▲전문기술과정의 설치, ▲석사과정의 확대, ▲교수 임용 및 시설 확충 등을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학생과 교수의 수를 늘리고, 새로운 실험기기 등의 기자재를 설치하려면 새 건물, 즉 새 공간이 필요했는데, <한국과학원 제2차 5개년 계획>의 청사진은 서울 홍릉캠퍼스의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 사회의 고급과학기술 인력 수요는 계속 증가할 전망이어서, 시설 확장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해법이 대덕분원 건설이었다. 1978년 3월 열린 이사회에서는 대덕캠퍼스 건설 계획이 보고되었고, 7월에는 캠퍼스 부지를 결정했다. 이듬해 7월 과학기술처가 분원 건설 계획을 확정하면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해 10.26 사태와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국가 과학기술정책에 커다란 변화가 일면서 대덕분원 계획은 전면 보류, 재검토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과학원 설립 초기의 역사

71.2.18 창립이사회, 창학 작업을 위한 잠정 직제 제정
71.2.23 창립이사회에서 선임된 정근모 박사, 한국과학원 부원장에 취임
71.3~6 뉴욕 브루클린 공대 내 한국과 학원 임시 주미연락실 설치 후 활발한 사업 전개
71.3.8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홍릉 답사 후 한국과학원 부지 최종 확정
71.3.13 이상수 원장, 미 국문성 초청으로 미국 방문, AID 차관 문제 협상
71.4.14
박정희 대통령 참석한 가운데 한국과학원, 한국개발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3개 기관 합동 기공식 거행
71.4.24 <5개년사업계획서> 1차안, 제1회 인사이사회 안건으로 상정
71.6 김기형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 퇴직 후 최형섭 박사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취 임
71.8.31 경제기획원 장관, 이상수 원장, 미국측 대표인 애들러 USA/K 처장이 자리해 정식 차관협정 체결
71.9 보고서<브루클린공대 학사자문단>제출
71.9.10 수정된 <5개년사업계획서> 의 2차안, 제3회 임시이사회에 회부 후 정식으로 승인
72.1.8 USCO 설치계약, 차관협정에서 제시한 시한보다 2개월 가량 늦게 체결
72.3.11 박달조 박사 제2대 원장 선임
72.7 <5개년사업계획서> 완성본, AID에 제출
73.1 경희대학교 공학동에서 첫 필기시험 실시, 231명 선발
73.1.24~27 구두시험 실시 후 최종합격자106명 선발
73.3.5 첫 입학식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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