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그곳 해변에는 뼈대만 앙상한 생명체가 산다. 거대한  곤충 혹은 공룡의 모습을 한 이상한 동물이 바람의 힘으로 스스로 움직인다. 가까이에서 보면 이들의 뼈대는 다름 아닌 플라스틱.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현재 아티스트의 길을 걷고 있는 네덜란드 태생의 테오얀센(Theo Jansen)이 이들의 아버지다.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그의 자식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9월, 바람을 영혼 삼아 움직이는 그 거대한 생명체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창조주는 단백질로 생명체를 만들었지만, 나는 플라스틱으로 생명을 창조했다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생명체가 날개를 펄럭이며 해변을 유유히 산책한다. 바람을 먹고 사는 해변동물(strand beast)에게 바람이 많은 네덜란드의 해안가는 최적의 서식지이다.
해변동물 시리즈는 플라스틱 관과 나일론 끈, 그리고 바람을 저장하는 데 쓰이는 빈 페트병을 적절히 연결한 구조물이다. 해안가에서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같이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해변동물이라 불린다.
해변동물에게 플라스틱 관은 생명체의 단백질 또는 유전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들이 걸어 다니는 메커니즘도 플라스틱 관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된다. 등에 달린 날개가 바람에 의해 움직이면, 날개에 연결된 축이 중심과 연결된 다리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해변동물의 수명은 평균 2년 정도이며, 움직일 때 모래를 파서 운반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실제 생물들처럼 해안가의 환경을 변모시키기도 한다.
해변동물들이 움직이다가 서로 뒤엉킬 때도 있다. 테오얀센은 이들이 서로 함께 움직일 때 해변동물이 단체생활을 한다고 정의했다.
테오얀센은 여러 차례 해변동물을 진화시키기도 했다. 초기 작품들은 관절이 테이프로 연결되어 누운 상태에서 다리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갈수록 관절이 단단해져 폭풍에도 견디게 되었다. 더 나아가 피스톤과 날개를 연결해 근육처럼 움직이게도 했고, 페트병에 공기를 압축 저장함으로써 바람이 불지 않아도 파도를 피해 도망갈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감지기관을 이용해 물과 모래 언덕으로 구성된 해안가의 환경을 인식할 수 있어 자신의 신체를 보호할 수 있다.

“예술과 공학 사이의 장벽은 우리 마음에서만 존재한다” - 2006  BMW CF

테오얀센은 1948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작은 해변마을인 스헤베닝겐에서 태어났다. 델프트(Delft)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1975년 돌연 물리학 연구를 그만두고 화가로 전향한다.
키네틱 아티스트로서 활동에 주력하던 그는 1990년부터 스스로 걷고, 진화하는 거대한 생명체인 해변동물의 창조에 몰두한다. 200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BMW 광고에 등장한 해변동물이 인기를 끌면서 그는 대중적인 스타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해오던 테오얀센은 아이들이 철물점에서 파는 전기 배선용 플라스틱 관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노는 것을 보고 플라스틱을 이용한 생명체 제작을 시작하게 된다.
모든 해변동물의 이름은 ‘아니마리스(Animaris)’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동물(Ani)과 바다(Maris)의 합성어인 이 이름에는 자연과 생명을 존중하는 그의 작품 철학이 담겨 있다.
2009년 7월, 그는 친환경 소재로 제작된 해변동물 작품들을 인정받아 유엔환경계획(UNEP)에서 제정한 에코 아트 어워드(Eco Art Award)를 받았다. 재활용한 플라스틱을 재료로 사용했고, 친환경 동력인 풍력을 이용해 환경 문제에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이 인정받은 것이다. 또한, 전기에너지가 필요한 로봇과 달리 자연에서 얻은 에너지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로봇 공학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를 인류에 공헌하는 공학자라 부르는 이도 있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예술가라 부르는 이도 있다. 그러나 ‘예술과 공학 사이의 장벽은 우리 마음에서만 존재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를 어떻게 바라볼지는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

‘그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
바람을 이용해 스스로 움직이는 해변동물 시리즈

해변동물의 진화단계는 작품의 구성 재료와 제작 방법에 따라 8단계 25종으로 나뉜다. 이들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세 종의 해변동물의 특징과 원리를 간단히 알아보자. 더 많은 종류의 해변동물은 이번 ‘테오얀센전’ 관람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작품 설명을 해주는 도슨트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모든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1. 아니마리스 제네티쿠스 (Animaris Geneticus)
‘제네티쿠스’는 관으로 구성된 마디가 생명체의 유전자(gene)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변동물 시리즈의 초기 작품으로 1997년에 제작되었다. 357개의 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변종도 많다.
제네티쿠스는 최초로 단체생활을 시작했다. 해변동물이 단체생활을 하면 서로 단단히 묶여 날아가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다리가 엉킬 수 있다는 단점도 있어 수명은 2년 이하다. 테오얀센 일본전 당시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풍차’라 불렸던 작품이기도 하다.

2. 아니마리스 페르치피에레 프리무스 (Animaris Percipiere Primus)
감지(perceive)라는 뜻의 ‘페르치피에레’와 첫 번째(prime)라는 뜻의 ‘프리무스’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즉, 두뇌를 가지고 주변 환경을 감지할 수 있는 첫 번째 동물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해변동물이 활발히 만들어지던 시기를 ‘두뇌의 시대’라 한다. 비닐로 된 날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덩치가 커서 무거운 편이다. 따라서 동력원인 날개에는 바람을 저장하는 페트병이 상당수 필요하다.
프리무스는 바닷물을 만나면 반대 방향으로 피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땅과 맞닿고 있는 긴 호스에 바닷물이 닿으면 일종의 피스톤 역할을 하는 관들이 대기와 차단되면서 내부 압력이 커져 진행하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가장 두터운 척추를 가지고 있으며 꽃게처럼 옆으로 걷는다.

3. 아니마리스 우메루스 (Animaris Umerus)
테오얀센의 최신 작품으로 2009년 완성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시된다. 날개 부분을 친환경 소재로 제작해 에코 아트 어워드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테오얀센을 전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이다.
‘우메로스’는 어깨라는 뜻으로 움직일 때 어깨 부분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우메로스는 물 감지 기관과 모래 감지 기관을 가지고 있다. 물 감지 기관은 프리무스의 것과 같이 물에 닿으면 압력의 차이로 피스톤 운동의 전환을 일으킨다. 모래 감지 기관은 걸음에 무리가 생길 때, 근육에 가해지는 압력을 감지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람이 세게 불어 넘어질 것 같을 때에는 꼬리에 달린 망치를 이용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해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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