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광주, 그 30년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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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광주, 그 30년을 말하다
  • 박진현 기자
  • 승인 2010.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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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18일은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5.18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또 현재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박만규 소장에게 그 의미를 들었다 <편집자 주>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1980년의 봄은 사방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만큼, 상기된 얼굴의 젊은 학생들로 넘쳐났다. 전국 대학의 교정과 거리, 광장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함성이 울렸다. 10만 명 이상의 대학생이 모여 민주화 열기를 뿜어냈던 5월 15일의 서울역 광장 집회는 절정이었다. 그럴 만했다. 이미 1960년 4.19 의거로 독재자를 끌어내려 심판한 바 있는 청년들은 1972년의 유신 개헌으로 날로 옥죄어 드는 군사독재의 굴레를 벗기 위해 몸부림쳤다. 마침내 1979년 박정희 피격을 통해 유신체제가 일거에 무너지자 학생들은 물론 전 국민이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해 왔던 민주주의 회복을 기대해 마지않았다.

화려했던 서울의 봄,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러나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국민적 민주화 열망을 외면한 채 군부 독재의 연장을 획책했다. 학생들을 선봉으로 한 민주 세력과 신군부 세력의 팽팽한 힘겨루기는 5월 17일 자정에 발표된 계엄령의 전국 확대 조치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울고 말았다. 활짝 피어난 봄꽃들이 기습 한파에 놀라 움츠러들 듯이 일시에 전국이 공포의 정적 속에 잠기고 말았다. 단 한 곳, 광주를 제외하고는.


전남대학교 정문, 그곳에서 역사가 시작되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계엄령의 전국 확대를 빌미로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발령되었다. 휴교령과 동시에 전국 대학을 급습한 계엄군은 학내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적막해진 다른 대학과 달리 전남대학교 정문에는 300여명의 학생이 모였다. 신군부의 반격이 우려되던 상황에서 ‘휴교령이 내리더라도 학교 앞에서 만나자’라는 사전 약속에 따라 등교한 학생들이었다. 이들과 정문을 지키고 있던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피투성이가 되었고, 이를 본 주민들은 경악했다.

계엄군의 야만적 폭력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은 시내 전역에서 강력한 저항을 했다. 경찰력만으로는 대처가 어렵다고 판단되자 중무장한 공수부대가 직접 투입되어 폭력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폭력에 전 시민이 분개한 것은 물론이고, 고등학생들까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에 나섰고 이에 광주 시민은 총기로 무장함으로써 시민군이 출현했다.

해방된 광주, 짧았지만 훈훈했던 기억
치열한 공방 끝에 21일 계엄군은 시민의 힘에 밀려 시 외곽으로 퇴각했고 광주는 일주일 동안 해방공간이 되었다. 불안하고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민들은 스스로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질서체계를 형성하고 자치공동체를 만들었다. 수천 정의 총기가 풀린 속에서도 약탈이나 강도 같은 불상사는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동안 광주에서는 김밥이 나누어지고, 서로 다투어 헌혈을 자청하는 뜨거운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에서도 희귀한 이때의 체험을 광주 시민은 ‘해방 광주’라는 말 속에 담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해방 광주의 주인이 되어 누린 자유와 평화는 너무 짧았다. 불과 일주일 만인 27일 캄캄한 새벽, 도청에 진입한 계엄군 특공대가 시민군을 제압함으로써 광주 시민항쟁은 종막을 고했다. 무수한 총탄소리를 들으며 광주 시민은 숨죽인 채 분노와 오열을 삭여야 했다. 어렴풋이 동이 터올 무렵 계엄군의 헬기와 트럭이 시체와 부상자들을 어딘가로 실어 갔고, 생존자들은 도청방화자,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계엄사에서는 광주 진압과정에서 17명이 숨지고 295명을 보호 중이라고 짤막하게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80년 5월 열흘간에 걸친 광주 시민의 항쟁은 일단 비참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패배로부터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내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다. 광주 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출범한 전두환의 5공 정권은 이에 대해 철저한 침묵을 강요했다. 그러자 유가족들이 들고 나섰다.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로 결집한 유족들은 당시 가장 불온하다고 여겨지던 망월동 묘지를 정기적으로 참배했다. 이들은 갖가지 탄압 속에서도 “5.18을 보상하라”, “내 자식을 살려내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집회와 시위, 점거농성, 성명발표 등으로 군부 독재에 작은 균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냈다. 당연히 경찰과 정보기관의 가혹한 탄압이 뒤따랐다. 하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은 한 서린 어버이보다 더 용감한 전사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느 것도 이들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노력은 살벌한 분위기를 서서히 녹이며 전국의 운동가와 조직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이 전열을 정비하고 강화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광주 항쟁에 뿌리를 둔 5월 운동이라는 예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민주주의 승리의 최종 도화선이 된 6월 항쟁
1987년 6월, 전국에 걸쳐 군부 독재 종식을 외치는 민주화 운동이 폭발했다. 이것이 광주 항쟁의 전국 확대판이라 할 수 있는 6월 항쟁이다. 6월 항쟁에서는 집권세력에게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6.29 항복 선언을 강요했다. 한 세대에 걸쳤던 군부 독재는 마침내 퇴각의 길을 걷게 되었다. 비록 그해 말에 시행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명된 노태우가 당선되었으나 민주화라는 대세는 꾸준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 다시 재조명 받다
노태우의 제6공화국 정부는 국민과 민주화 세력에게 상당히 양보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민주화합추진위원회라는 자문기구를 만들어 그동안 절대적으로 금기시해 왔던 ‘광주 사태’의 치유방안을 만들고 건의하게 했다. 이어 여소야대의 13대 초기 국회에서는 5공 청문회와 함께 광주특위가 개최되어 각종 집권비리 및 광주 학살 문제를 파헤쳤다. 끝내 전두환은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유배당했다. 이같은 정세 흐름 속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되었던 5.18은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되어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군부 독재 타파를 보여준 문민정부
노태우 정권에 이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등장은 이제 한국사회에서 더는 군부가 집권할 수 없게 된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김영삼은 신군부의 핵심 결집체인 하나회를 척결함으로써 군부세력 재등장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와 맞물려 광주학살 책임자의 사법적 처벌을 요구하는 흐름이 거세게 일어났다. 광주, 전남 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이 앞장서고 전국의 민주화 세력이 가세한 5.18 특별법 제정운동이 그것이었다. 그 결실로 1995년 말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의 5.18 가해 핵심인물을 법정에 세워 내란 목적 살인죄로 단죄할 수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나란히 서서 각기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그야말로 역사적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한국 민주화의 원동력, 5.18 민주화 운동
돌이켜 보면 80년 5월 열흘 동안의 짧은 5월 항쟁은 비참한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 계속된 5월 운동은 마침내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이끈 승리의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5.18 3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우리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그 한가운데에 5.18이라는 우뚝한 봉우리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19에서 시작한 한국 민주화의 대장정은 오랜 군부 독재의 압제 아래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다. 그후, 광주항쟁에서 다시 든든한 동력을 공급받고 87년의 6월 항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마치 많은 사람의 열망인 지리산 종주가 노고단과 반야봉 천왕봉을 잇는 능선을 밟듯이, 한 세대에 걸친 한국 민주화 운동이라는 장대한 파노라마 속에는 4.19와 5.18, 6월 항쟁의 우뚝한 세 봉우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전후좌우에 벌려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함께 자리 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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