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감에 잠긴 그 밤이 찾아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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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감에 잠긴 그 밤이 찾아오면
  • 하예림 기자
  • 승인 2019.05.2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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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 -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선글라스로 숨겨지지 않는 매혹적인 외모, 날카로운 송곳니와 창백한 피부. 그리고 눈빛에 묻어나는 긴 세월의 흔적.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은둔하며 햇빛이 사라진 밤에만 활동하는 이들은 뱀파이어이다.

 영화 속 뱀파이어는 피에 굶주린 괴물이 아니다. 인간을 물어 흡혈하지 않고, 병원에서 받은 혈액을 고상하게 음미한다. 이들은 영생을 누리며 순수의 극치에 도달한 예술가이다. 이브는 다양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아담은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음악가이다. 작가인 말로우는 쉴 새 없이 명문을 써낸다. 인간을 좀비라 칭하며, 인간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을 한탄하지만, 신분을 숨긴 채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슈베르트에게 자신의 곡을 주었던 아담, 셰익스피어에게 자신의 글을 주었던 말로우 모두 예술을 통해 좀비들 사이에 자리를 마련한다.

 21세기는 뱀파이어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각종 술과 마약으로 오염된 피를 마셔 탈이 나기도 하고, 신분을 숨기는 것도 예전보다 힘들어졌다. 세상에 대한 염증으로 가득한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이들은 사랑을 택했다. 이브는 독서, 아담은 음악, 말로우는 글쓰기에 대한 사랑으로 세상을 향한 권태를 짓누른다. 나무 총알을 제작할 정도로 삶을 끝내고 싶어 했던 아담은 모로코에서 지내던 이브가 그의 집으로 온 후 삶의 의미를 찾았다. 더는 총알을 찾지 않는 아담을 통해, 영화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브를 연기한 틸다 스윈튼과 아담을 연기한 톰 히들스턴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돋보인다. 차분한 톤의 대사, 단조로운 표정 연기는 긴 세월을 함께 한 동지이자 깊이 사랑하는 뱀파이어 부부의 관계를 진정성 있게 표현했다. 짐 자무쉬 감독은 수많은 작품에서 다뤄진 뱀파이어를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소개해 영화의 가치를 높였다. 회전하는 레코드판과 밤하늘, 나른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이브와 아담의 모습이 겹쳐지는 첫 장면은 권태에 지친 뱀파이어들의 시간을 미학적으로 담아냈다. 예술가들의 이야기답게 음악과 문학 작품으로 대사의 여백을 채운 점이 인상 깊다.

 피의 공급책이 떨어지는 등 변해가는 세상에서, 예술에 몸을 숨긴 뱀파이어들은 생존을 위해 선택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가 간직해온 사랑은 그들이 좀비들의 세상에 더 오래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남긴다. 잔잔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불리는 날, 칠흑 같은 긴 밤을 살아남는 자는 오직 사랑하는 이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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