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정보개발팀 제공)

 다른 세계와의 만남은 때때로 위대한 영감을 불러온다. 껍질과도 같던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부서지면, 전통과 현대가 뒤섞이고 사상이 형태를 흐트러뜨린다. 부서진 세계는 새로운 미학과 가치로 재창조되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낳는다. 고암(顧庵) 이응노 화백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아름다움과 그 이상의 가치에 끝없이 도전해왔다. 그의 작품세계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현실 속에 숨겨진 가치를 탐구한다. 그리고 지금, 많은 후배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이응노 화백의 작품들이 박정선 작가를 만나 새로운 세계로 도약한다.


대나무 숲 속으로 첫 발을 내딛다

 이응노 화백의 작품 활동은 사군자를 주 소재로 하는 문인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대나무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이응노 화백은, 미술계에 등단하던 순간부터 추상미술의 세계를 추구하던 말년까지 인생을 대나무와 함께한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곧은줄기와 뾰족한 잎사귀로 표현되던 대나무는, 이후 점차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기 시작하며 <군상> 등 그의 다른 작품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응노 화백에게 대나무는 평생을 함께한 친구이자 전통적인 선비정신을 일깨워주는 존재였다.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미술을 접한 이응노 화백의 작품세계는 한차례 변화를 맞이한다. 문인화의 관념적인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사실주의 표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소재나 필묵을 이용한 작업 방식은 변하지 않았지만, 과감한 생략과 추상화로 이전과 다른 시도가 이어졌다. 전통적인 풍경 수묵화와 추상화된 배경이 어우러진 반추상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프랑스로 향한 이후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에 몰두하기까지, 이응노 화백의 작품에는 그의 세계가 변화해온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해체된 글자 속에서 조형미를 찾다

 1958년, 이응노 화백은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 자크 라센느의 초청을 받고 프랑스로 향한다. 다시 한차례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한 도전이었다. 이후 주로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이어간 이응노 화백은 콜라주, 릴리프 등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며 작품에 질감 효과와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거칠게 칼로 긁어낸 종이, 흩뿌려진 모래, 솜 뭉치 등의 다양한 소재로 완성된 동양적 추상화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앵포르멜 추상과 대응되며 높이 평가받았다.

 1960년대 중반 이응노 화백은 동양의 문자와 서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자연의 생김새와 소리, 의미가 추상화되어 만들어진 한자와, 기하학적이고 구성적인 조형미를 지닌 한글은 그 자체로 추상예술이자 훌륭한 소재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탄생한 문자추상 작품들은 서예의 우연적인 표현기법과 어우러지거나 서양미술의 다양한 소재와 만나 이응노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의미와 소리를 지니는 글자는 이응노 화백의 손에서 해체되고, 추상화되며, 다시 재구성되어 보는 이에게 조형미와 함께 기호가 지니는 철학적 의미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


관찰자가 아닌, 창조자이자 예술가로

 예술과 과학기술의 융합으로 관객은 더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게 되었다. 관객의 손에서 매 순간 새롭게 탄생하는 예술작품은 또 하나의 벽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박정선 작가의 <바람 부는 대나무 숲> 앞에 선 관객들은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대나무숲을 마주한다. 흔들리는 대나무와 함께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색다른 공감각적 체험을 제공한다. 또 다른 작품인 <썼다 지웠다> 앞에서 관객들은 더 적극적으로 예술 속으로 뛰어든다. 관객은 각자의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이자 글자가 부서지고, 추상화되며 자율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관찰자이다.

 이응노 화백이 동양화의 전통적 요소를 새롭게 재창조했듯이 박정선 작가는 과학기술과 예술을 결합하여 색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양반집 서재나 고풍스러운 미술관 벽에 걸려 고상한 사람들의 취미로 남았던 미술이 현대적인 즐거움을 겸비하여 관객들을 맞이한다. 이응노 화백의 아름다움에 대한 끝없는 시도가 또 다른 세계로 발돋움하는 순간이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그가 많은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끝없는 탐구와 열정으로 더 넓은, 더 가치 있는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응노 화백의 작품세계는 연구자들의 진리에 대한 도전과도 맞닿아있다. 이응노 화백과 박정선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과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려는 탐구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장소 | KAIST비전관 기획전시실

기간 | 2019.03.12.~2019.05.17.

요금 | 무료

시간 | 평일 10:00 ~ 17:00

문의 | 042)350-4470

사진 | 학술정보개발팀 제공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