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

 

▲ (주)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궁전은 마치 전쟁터와 같다. 병들고 망가진 여왕은 왕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인 잃은 권력은 이리저리 휘둘린다. 여왕의 총애를 받기 위한 갖은 노력 속에서, 사랑과 정념, 애국심과 생존본능이 뒤엉킨다. 여왕을 무시하듯 허영심으로 가득 찬 귀족들의 파티 뒤편, 세 여성이 각자의 욕망을 내비친다.

 18세기 초, 앤 여왕의 영국은 격동하고 있었다. 앤 여왕은 명예혁명 직후 즉위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Great Britain)의 첫 군주이다. 하지만 강해진 의회의 힘과 함께 왕권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고, 프랑스, 스페인과의 전쟁도 이어졌다. 이미 17명의 아이를 모두 잃고 건강마저 나빠져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던 앤 여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사라에게 모든 일을 떠넘겨버린다. 진정한 사랑을 믿었던 여왕은 결국 권력에서 눈을 돌리고 만다.

 어느 날, 사라의 사촌 아비게일이 사라를 찾아온다. 아버지의 도박 빚 때문에 어린 나이에 팔려가 갖은 고초를 겪은 그녀는 무슨 일이든 시켜 달라며 사라에게 애원한다. 사라의 지시로 궁전의 시녀로 일하게 된 아비게일은 우연히 여왕의 병을 알게 되고, 여왕을 위해 약초를 구해온다.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사라의 직속 시녀가 되어 사라와 함께 여왕의 곁에 머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게일은 사라의 방에서 사라와 여왕의 정사를 목격한다.

 앤 여왕은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어온 인물이다. 먼저 떠나보낸 자식들의 이름을 붙인 토끼들만이 유일하게 그녀의 아픔을 함께했다. 그녀는 어릴 적 낙마 사고를 당한 자신을 멋지게 구해줬던 사라가 다시 한번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지만, 귀족 영애로 어떤 결핍도 없이 자란 사라는 앤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아비게일은 앤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망가진 앤을 대신해 사라가 정무에 나선 사이, 아비게일은 죽은 아이들의 생일이자 기일을 맞아 슬퍼하는 앤을 위로하며 더 가깝게 다가간다.

 영화는 세 인물의 주된 욕망이 변화하는 과정을 비추며 심화한다. 추락에 대한 공포로 얼룩진 아비게일의 욕망은 진실한 사랑이나 우정을 모두 거부한 채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여왕과의 사랑을 연기하고, 남성의 정념과 귀족들의 권력욕을 이용하며 자신의 지위를 높여간다. 진정한 사랑을 믿던 여린 여왕은 아비게일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의 기쁨을 깨닫고 자신의 권력을 가져간 사라의 마음을 의심한다. 이와 반대로 사랑을 잊고 지내던 사라는 한 차례 추락을 겪은 후 앤에게 자신의 사랑을 호소한다. 영화를 러브스토리로 만들어주는 앤과 사라의 사랑은 두 인물의 태도 변화로 강렬하게 대비되어 그려진다.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서, 사랑과 우정이 가지는 가치의 빛이 바랜다. 서로의 이익과 욕망이 어지럽게 뒤섞인 전장에는 분명 순수한 사랑이나 진실한 우정이 숨어 있지만, 그 속에서 헤엄치는 모두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진정한 사랑이 있더라도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감독의 차가운 물음에, 오직 아비게일만이 자신을 숨기고 연기하며 답한다.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