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파누를 처음 만난 것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낙엽이 지려는 때였다. 베트남에서 온 지 일 년이 조금 안 된다는 파누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제법 능숙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학교에서 외국인 학우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어 선생님으로 지원했고, 파누는 내가 맡은 첫 학생이다.

어느 날 나는 파누에게 왜 한국어를 공부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 대학을 4년이나 다니면서 그 나라 언어 정도는 기본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내게 되물었다. 그러면서 나중에 학교를 졸업해 회사에 들어가 한국 기업과 사업을 할 경우 지금 배운 한국어가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에서는 한국 기업에 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 학교에는 파누처럼 한국어 배우기에 열심인 외국인도 있지만, 한국에 살면서도 한국어로 숫자 세는 것조차 할 줄 모르는 외국인이 더 많다. 왜나햐면 그들이 우리 학교에서 공부할 때 한국어 구사 능력은 ‘전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고, 교재는 영어 원서가 기본이다. 시험 일정을 알리는 강좌 홈페이지의 글, 학교 홈페이지의 사소한 공지까지 모두 영어가 병기되어 있거나 심지어 영어로만 적혀 있는 것이 우리 학교의 일상적 풍경이다. 물론 이들에게 적절한 교육 환경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학교의 자세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어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일본의 유수 대학에서는 모든 수업을 일본어로 진행하며, 교재까지도 일본어 교재를 사용한다. 일본은 왜 외국인 학생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가면서까지 일본어 강의를 고집할까? 외국인 학생에게 자국어인 일본어를 사용하게 해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주체성을 학생에게 전하겠다는 의도다.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은 결국 그 나라 문화의 본질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우리 학교의 환경이 외국인 학생의 생활을 편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영어만을 사용하면서 한국에서 공부한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주체성을 과연 어떻게 접하게 될지 의문이다.

일본이 처음부터 자국 언어를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만 해도 일본은 서구 문물을 배우기에 급급한 국가였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서구 문물을 배우고 내면화시키는 데에 주력해 왔다. 이 시기에는 영어는 물론,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독일의 언어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빠른 시간 안에 서구 문명의 장점들을 흡수했고, 20세기 중반부터는 서구의 것을 배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흐름 속에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기라성 같은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로부터 서구 문물을 학습하고, 이것들을 내면화시켜 스스로 세계적인 것을 창조했던 일본인들의 노력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민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단지 대세를 따르기에 급급해 언어 학습의 근본적인 목적을 잊고 있지는 않을까. 국제 정세는 시시각각 변하므로 결국 살아남는 것은 대세만을 쫓는 근시안적인 시야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정체성과 발전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이번 학기 마지막 한국어 수업을 마치면서 파누에게 방학 계획을 물었다. 그는 자신 있게 한국어 공부에 집중할 거라고 말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나를 바라보는 파누에게 이번 방학은 영어 공부에 주력할 거라고 말하며,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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