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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렌시아, 바쁜 세상 속 나만의 피난처
[452호] 2018년 09월 18일 (화) 오현창 기자 hyunchang@kaist.ac.kr

 어두운 곳에 갇혀있던 소는 밝은 투우장으로 나오자 흥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밝아진 세상에서 그를 맞이하는 것은 투우사의 창과 작살이다. 흥분은 이내 공포와 뒤섞이고, 소는 투우사에게 돌진한다. 싸움이 계속되고 소의 죽음이 다가오며 경기장 내의 가상의 공간, 케렌시아가 생겨난다. 투우사에게는 경기장의 평범한 일부이지만, 소에게는 가장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헤밍웨이는 케렌시아 안의 소를 공격하면 매우 난폭해지며, 죽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매일 투우장의 소처럼 힘겨운 일상과 맞서는 우리가 쉴 수 있는 케렌시아는 어디에 있을까?


2018년, 이제 물질에서 마음으로

 상처와 치유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으며, 우리 주변에는 ‘힐링’ 콘텐츠가 넘친다. 통계청의 2014년 생활시간 조사에서 응답자의 81.3%가 평소 심신의 피곤함을 느낀다고 답했고, 우리나라의 우울증 환자 수는 2016년 60만 명을 넘어섰다. 통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과제, 아르바이트, 업무 등에 치여 숨돌릴 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히 보인다. 월요일 아침 힘겹게 일어나 교실, 연구실, 직장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어둠 속을 빠져나와 스물네 시간의 투우 경기장으로 향하는 소의 뜀박질처럼 비장하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간다. 보다 정확하게, 현대인의 일상은 필연적으로 바쁜 성격을 가진다. 우리에게 필수를 강요하는 사건은 종종 우리의 의사에 무관하게 발생하며, 우리의 시간을 빼앗는다. 한때 일하기를 원했던 인간의 욕구는 원하지 않는 바쁨에 지치고 여유를 향한다. 하지만 욕구의 도피도 나날이 줄어드는 여유와 운명을 같이해 좌절된다.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발표한 2018년 소비 트렌드 10개 중 세 항목인 소확행, 워라밸(Work-life Balance), 그리고 케렌시아는 바쁘고 성공한 삶보다 여유로운 삶에 관심을 가지는 현대인을 비춘다. 바쁜 일상을 극복하고 여유를 되찾기 위해선 우리가 바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왜 항상 바쁠까

 농경 혁명, 산업 혁명 등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발전은 인류의 생산성과 직결되어 있다. 한 명의 인간이 생산하는 물품의 양이 수백 배 이상 증가한 사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하루의 반가량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지금과 비교해 초라한 생산 효율을 가진 원시인들은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해야 했는가?

 시대의 변화가 불러온 거대한 차이를 간과한 무지한 질문이지만, 현대인의 생활에 의구심을 가질 필요는 분명히 전하고 있다. 척박한 칼라하리 사막의 수렵채집인이 주 평균 40시간을 일할 때, 대한민국은 주당 근무 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실행했다. 자본주의가 내재한 사회적 불평등을 감안하여도, 산업 역량의 발전에 반하는 이 차이는 제대로 된 해석을 요구한다. 

 두 생활 방식에서 나타나는 바쁨의 차이는 부분적으로 현대 산업이 원시적 생산에 비해 훨씬 좁은 공간에서 많은 생산을 필요로 하기에 밀도를 높이기 위한 추가 노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현대 산업 대부분이, 그리고 우리의 생산이 생존이 아닌 추가적 기호를 위해 작동하는 것에 있다. 광고를 포함한 취향의 조작과 타자와의 비교를 통한 격차의 인식은 우리가 필요 이상의 기호를 갖게 한다. 우리의 조작된 기호는 스스로가 생산 기계의 부품이 되게 한다.


바쁘게 살아야만 가치 있는 삶인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이 인사를 건넨다. 요즘 바쁘냐고 물어본다. 바쁜 사람은 푸념을 늘어놓는다.  설령 바쁘지 않더라도 할 일이 있다고 둘러댄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바빠지기보다는 여유롭기를 선호하지만,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은 꺼려한다. 모두 여유 없이 살고 싶지는 않으나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대변하는 바쁨을 포기할 수는 없는 딜레마에 빠진 이유이다.

 바쁘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수요의 질과는 무관한 반면, 양과는 직결된다. 질적인 것에 대해 판단하는 것에 비해 통계를 기반한 양적 비교는 간단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의 발전 이후 몇 세기에 걸쳐, 바쁨과 능력 사이의 간접적 상관 관계는 인간의 관념 속에 성공적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바쁨은 우리의 거부감을 완화하고 개인의 가치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17세기 귀족들이 생산 활동보다는 사치스러운 여가에 집중했던 데 비해 21세기에는 정장을 차려입고 명품 시계를 보며 바쁘게 일하고 있는 화이트칼라가 상류층의 이미지가 되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 경영대학의 한 실험은 이 현상을 뒷받침한다. 실험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가상의 인물인 35세 남자 제프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첫 번째 그룹에게 제프는 달력에 일정이 늘 가득 차 있는 바쁜 사람으로, 두 번째 그룹에게는 일을 하지 않고 여가가 넘치는 삶을 즐기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각 그룹에게 제프의 사회적 지위에 점수를 매기게 했더니, 첫 번째 그룹이 훨씬 높은 점수를 주었다. 사치스러운 여가는 여전히 고소득층의 전유물이지만, 현대에 일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기 때문인 것을 생각해보면, 여유보다는 바쁨이 보편적인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은 자연스럽다.

 SNS나 단체 채팅방에서 우리는 종종 수많은 과제와 실험을 불평하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표면적으로는 신세 한탄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의 바쁨과 생산 능력 과시가 은밀히 숨어있기도 하다. 불평할 정도로 바쁜 자신을 과시하고 바쁨의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은 가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바쁨의 이면적 숭배’는 어딘가 일그러져 있다.


근사한 여가를 향한 강박

 고양된 취미를 포기하고 단순 생산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기호를 경험한, 타락했을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사람들은 여가를 통해 바쁜 일상의 고됨을 이겨낸다. 무한한 노동의 틈 속에서 잠시 생산 활동을 멈추고 휴식을 만끽하는 것이다. 휴가를 뜻하는 영어 단어 ‘vacation’과 프랑스어 ‘vacances’는 비워내다는 뜻의 라틴어 ‘vacatio’에서 유래한다. 의미 있는 일에 목을 매던 ‘더하기’의 삶에서 여가는 유일한 ‘빼기’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일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여가는 일과의 경계가 모호해지곤 한다. 또한, 정보 기술의 발전은 자유를 만끽하려는 이들에게 언제든 여가를 종료시킬 수 있는 ‘메신저’를 탄생시켰다. 뛰어난 분배와 대처로 일로부터 온전한 여가를 얻어내도, 끊임없이 생산되는 현대의 욕망은 여가마저 생산을 위한 부속으로 변질시킨다.

 여행은 매력적인 여가 방식이다. 공간적으로 일과 단절되며 쉬는 행위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다. 해외여행은 국제 전화 요금이나 여행지의 열악한 통신 상황 등을 핑계로 휴가를 따라오려는 괴로운 일상의 조각들을 털어낼 수 있다. 더해 시차는 기존의 생활과 시간적으로 단절되었다는 환상을 준다. 여행의 새로운 체험 속에서 자아를 재발견하는 것은 흔한 사건이다. 그러나 여행도 자신의 기호를 과시하는 경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에 집중하고, 카메라로 세상을 본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근사한 맛집을 가고, 꾸준한 운동으로 자기 관리에 힘쓰고, 상류층들의 여가 방식을 즐기는지 SNS를 통해 세세하게 전달받는다. 여행의 과시와 비교는 먼 곳에 있을 우리의 케렌시아를 허물고 있다.


바쁜 사회 속 마지막 피난처

 현대는 정신없다. 사회는 투우사가 소에게 작살을 꽂듯 우리가 더 발버둥 치도록 채찍질한다. 경기장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가 쓰러지기 전 떠올리는 곳은 우리만의 케렌시아다. 케렌시아는 타인에게는 평범한 공간이지만, 자신의 지친 삶에 진정한 휴식을 선물하는 피난처이다. 

 마상원 학우(물리학과 16)는 자연을 사랑한다. 자연과 동화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도시 안에서 자연을 그리워한다. 어느 날 강변을 걷던 그는 강변에 있는 쓰레기, 더럽혀진 자연에 속상했다. 하나둘 쓰레기를 줍다가 몇 시간이 지났다. 그는 자연이 깨끗해지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하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도망치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자연은 행복을 주는 일상의 일부이다. 마상원 학우의 케렌시아는 자연이다.

 최태현 학우(전산학부 17)는 종종 미래를 걱정한다. 어떤 문제는 노력하면 해결될 것 같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기도 한다. 그는 걱정에 휩싸일 때면 컴퓨터 속 일기장을 찾는다. 일기장에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편안해진 마음으로 문제를 다시 관찰하고 고민한다. 최태현 학우의 케렌시아는 일기장이 있는 사이버 공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했다. 분명 사회와의 상호 작용은 우리의 큰 부분을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의 부품 이전에 의지를 가진 개인이다. 인간의 모든 성질을 규격에 맞춰 바라보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맹인이다. 언젠가 삶이 힘들어 세상이 더러워 보인다면, 때묻은 사회의 렌즈가 아닌, 깨끗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자신을 온전히 되돌아 볼 수 있는 공간, 케렌시아에서 새롭게 시작해보면 어떨까. 


참고도서 | <사실 바쁘게 산다고 해결되진 않아>, 한중섭, 책들의 정원,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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