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조아키노 로시니 서거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 <라 체네렌톨라> 등 다수의 벨칸토 오페라를 창작하여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를 발전시켰다. 오페라 외에도 가곡, 종교 음악 등을 작곡하고 미식가로서 활동하는 등 예술계에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는 삶을 살았다. 그의 대표작과 생애를 통해 로시니 음악의 특징과 19세기 문화에 그가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자.

 

벨칸토 세대의 마지막 작곡가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작품을 뜻하며, 음악 중심의 종합 무대 예술을 지칭한다.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포 페리의 작품 <다프네>가 오페라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며, 오페라의 기준에는 이탈리아 16세기 말에 나타난 음악 연극과의 비교가 포함된다. 모차르트, 헨델 등 17~20세기의 유명한 작곡가가 작곡한 다작의 오페라는 서양음악에서 오페라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오페라 작곡 초기 시절, 활발하게 사용된 ‘벨칸토’ 양식은 오페라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아름다운 노래’로 직역되는 벨칸토(Bel canto)는 17, 18세기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가르친 성악법이며, 통상적으로 19세기 초반 이탈리아 오페라의 주요 양식을 부를 때 사용된다. 로시니 이후 작품에서는 벨칸토 스타일을 사용하지 않아, 로시니는 벨칸토 창법을 고수한 마지막 오페라 작곡가로 불리게 되었다.

 로시니는 연주자 아버지와 가수 어머니 사이에서 일찍 음악을 접했고 음악적 소질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카발리 후작의 후원 아래 오페라 <결혼보증서>를 포함해 수많은 작품을 공연했다. 멜로디를 구성하는 천부적 재능은 유럽 전역을 찬사로 채웠고, 로시니는 이른 나이에 부와 명성을 얻었다. 1813년 이후 발표한 세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며 볼로냐로 돌아갔으나, 그를 고평가한 도미니코 바바야에 의해 나폴리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활동을 재기했으며, 1815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타> 등이 호평받았다. 영예롭게 귀환한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무대에 올린다.

 

최고의 작품, <세비야의 이발사>

 <세비야의 이발사>는 로시니 작품 중 최고로 인정받는다.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는 1775년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가 쓴 동명의 희극을 각색한 작품이다. 로시니가 3주 만에 만든 이 작품은 1816년 2월의 첫 공연에서 참혹한 실패를 거두었다. 그러나 동명의 오페라를 창작한 파이지엘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공연에 관한 감상보다 방해가 앞선 결과였고, 재연 무대에서 보여준 높은 작품성에 관객들의 호응이 따랐다. 이 작품은 열렬한 환호 속에서 런던, 뉴욕에서도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세비야의 이발사>에 관해 작곡가 베르디는 “음악적인 상상력과 자연스러운 인물들의 보컬 라인이 정교해 진부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그는 로시니가 심혈을 기울인 제1막 피날레의 선율을 극찬했으며, 인물들이 각자 열변을 토하듯 활기차다고 평했다. 이와 같이 개개인의 서사가 뚜렷한 구성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던 관례를 깨고 주변 인물과 오케스트라의 비중을 키웠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 하다. 로시니는 보마르셰가 쓴 희극의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며 경쾌한 선율과 활동적인 아리아를 추가해 재치 있는 희극 오페라를 완성시켰다.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성공을 거두며 세계적인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듬해 상영된 <라 체네렌톨라>는 샤를 페로의 동화 <상드리옹>을 각색한 오페라로, 각본가 자코포 페레티와의 협의하에 제작되었다. 오페라 권위자인 찰스 오스본은 제1막의 피날레에 대해 “서곡의 크레셴도를 활용한 빠르고 격정적인 앙상블”이라 언급했다. 막이 끝날 무렵 노래의 규모가 점차적으로 커지는 기법은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비롯됐으나, 로시니가 독창적인 기법으로 발전시켜 ‘로시니 크레셴도’로 불린다. 제2막에는 로시니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테너의 격정적 고음을 포함한 아리아와 전체 인물의 감정을 토로하는 6중창이 등장한다. <라 체네렌토라>의 선율 일부는 전작 <신문>, <세비야의 이발사> 등에서 차용했으며, <세비야의 이발사>와 마찬가지로 유쾌한 결말을 맺는다.

 

극한점이 없는 로시니의 걸작들

 로시니의 주요 작품인 <세비야의 이발사>, <라 체네렌톨라>가 모두 희극 오페라는 점에서 로시니를 과소평가하는 세간의 시선도 있었다. 로시니가 빈에 머물 적 베토벤은 그에게 “이탈리아인들은 현실적인 드라마를 다루는 음악적인 경험이 부족한데, 그런 그들이 어떻게 이탈리아에서 음악적인 견문을 넓힐 수 있겠느냐”며 비판했다. 하지만 로시니는 스스로를 희극 오페라 작곡가로 예속하지 않고 넓은 작곡 활동을 이어갔다. 1923년 2월 초연한 후속작 <세미라미데>는 비극 오페라에서의 그의 역량을 증명하듯 관객의 갈채 속에서 막을 내렸다. <세미라미스>의 제1막 피날레에서도 로시니 크레셴도가 등장하는데, 찰스 오스본은 크레셴도가 “마지막의 비바체 앙상블을 감동적인 결말로 이끈다”고 평했다. <세미라미데>의 제2막은 평범한 비극 오페라와 다르게 구성되었으며, 합창이 “비극 오페라답지 않게 쾌활하다”는 평을 들었다.

 1829년에 완성한 <윌리엄 텔>은 화려한 볼거리와 발레, 대담한 아리아와 대규모 합창단 등이 투입되어 로시니의 오페라 중 가장 큰 규모의 무대를 자랑한다. 본격적으로 도래한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서 작곡된 <윌리엄 텔>은 이전의 작곡 스타일과 다르게 낭만주의 성향이 강조되었다. 4시간에 달하는 이 오페라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다.


오페라 작곡 중단과 로시니의 여생

 <윌리엄 텔> 이후 오페라 작곡을 멈춘 그는 주로 프랑스에 머물며 다른 예술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본인은 오페라 작곡보다 먹는 것이 더 즐겁기 때문이라 밝혔지만, 그의 작품을 노래할 성악가도 구하기 어려웠다. 이전의 성악가들은 전통 벨칸토 창법을 교육받았으나, 벨칸토 창법을 멀리하는 음악계의 흐름 속에서 로시니의 오페라는 공연될 자리를 잃었다. 대신 로시니는 피아노 독주곡 모음인 <만년의 잘못>을 포함한 종교음악과 가곡 등의 작곡을 이어갔다. 14권에 달하는 <만년의 잘못>은 <윌리엄 텔>에서 보였던 낭만주의적인 감정의 역동성 대신 고전적이고 유창한 선율을 담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로시니는 미식가로서도 활약했다. 로시니는 직접 요리책을 집필할 정도로 음식에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프랑스 요리 중 ‘알라 로시니’가 이름에 들어가는 요리는 모두 트러플이 들어가는데, 로시니의 조언으로 탄생한 메뉴들이다. 트러플에 대한 로시니의 애착은 그가 지인들에게 했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로시니 본인에 의하면 그가 평생 울었던 단 세 번은 그의 첫 오페라가 공연에 실패하였을 때, 어린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 파리의 센 강에서 보트를 타던 중 트러플을 곁들인 칠면조 요리를 빠뜨렸을 때라고 한다.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으로 유럽을 놀라게 한 로시니가 음식에서도 유명한 것은 음식에의 열정이 음악에의 열정만큼 강렬했음을 보여준다.

 

 로시니는 세련된 선율과 기발한 구성을 무기로 19세기의 이탈리아를 ‘오페라의 고장’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작곡가 베르디와 푸치니는 로시니 음악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 오페라의 계보를 이었다. 로시니는 벨칸토 오페라의 마지막 세대로,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 거장으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로시니의 오페라는 이른 시기에 끝맺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음표들은 현재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정교하게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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