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민국의 많은 인사가 미투 운동의 대상이 되어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여론의 반응은 울분이 섞인 지탄이기도 했고, 한숨이 섞인 개탄이기도 하였다. 미투 운동의 타임라인은 본지에서 다뤄진 바 있다. (관련 기사 본지 445호, <들불처럼 번져가는 미투 운동... 곳곳에서 드러나는 ‘괴물’의 흔적들>) 지금 미투 운동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운동이 사회에서 가지는 의의를 파악하고, 이후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살펴보려 한다.

왜 그들은 입을 닫았는가

  미투 운동은 대중이 모르던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권력 관계에 기반을 두고 일어나는 성폭행 사건이 보편적인 인식보다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폭행 피해자가 피해 사실의 신고에 곤란을 느껴왔음을 암시한다. 흔히 말하는 건강한 사회라면, 성폭행 사건을 쉽게 고발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성폭행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이유를 사회적 풍토에서 찾아보자.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대한민국을 ‘둔감함’을 권하는 사회로 평한다. 한국 정치는 왜 쉽게 바뀌지 않을까? 정치인을 평가할 때, 은연중에 ‘둔감력’을 첫 번째 기준으로 놓기 때문이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계에서 ‘둔감력’은 의연하게 자신의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이다. ‘둔감력’은 맷집이나 뚝심 등의 단어로 치환되곤 한다. ‘시위 공화국’ 대한민국의 모습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한다. 평소 정계는 시민의 목소리에 둔감하게 반응한다. 오직 언론에 보도되는 집단적 시위에만 민감하게 대응하는 동작을 취한다. 둔감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에서 민감한 행동은 배제된다. 이 세태 속에서 둔감을 ‘대범’, ‘포용’으로 착각하게 된 것은 아닌지 재고해야 한다.
  미투 운동은 숨 막히도록 둔감한 사회가 내뱉는 신음과 같다. 사회가 달랐다면, 성폭행 피해자는 주변의 지지를 받으며 사법적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사회가 알게 모르게 피해자를 되려 압박하는 태도를 취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보다 극단적으로 우리 사회의 ‘강간 문화’를 꼬집는 의견도 있다. 1900년대의 NYRF (New York Radical Feminists)는 강간의 주체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 했다. 이전까지 강간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일부 하층계급 남성이 저지르는 일탈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NYRF는 사실 평범한 남성에 의해서 강간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주장했다. NYRF의 임원인 수잔 브라운밀러는 남성이 사회를 통제하고 여성을 지배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 강간이라 말했다. 소수의 강간을 여성 사이의 공포를 확대, 재생산하며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수단으로 본다.
  미투 운동도 ‘강간 문화’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성폭력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강간 문화는 피해자마저 이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피해자는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을 우려해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강간 문화는 성폭행을 만연하게 만들었다. 이 만연은 양성 간의 권력 관계를 강화했다. 강간 문화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개념이며 구체적인 사회현상으로 칭하기에 논증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이 미투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이론이라는 사실은, 그간 성폭행이 얼마나 만연했었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미투 운동, 진통을 겪다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확산되고, 충격적인 성 관련 범죄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와 함께 미투 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 역시 많아졌다. 그중 가장 많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책임 주체의 부재이다. 미투 운동은 SNS를 둥지로 시작된 운동이다. 많은 미투 운동은 SNS를 창구로, 익명으로 이루어졌다. 폭로의 대상이 된 사람은 사회로부터 사적 제재, 다시 말해서 마녀사냥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적 제재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익명이라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폭로, 혹은 내부고발의 본질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술된 책임 주체에 대한 의견을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미투 운동은 익명성을 담보해주는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가 없었더라면 시작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수직적인 권력 관계에 억눌려 말할 수 없었거나, 말해도 경시되어 왔던 것들이 비로소 사회에 나온 것은 완전한 익명성 덕분인 것이다.
  또한, 잘못된 내용이거나 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기댄 폭로로 인해 미투 운동이 힘을 잃을 수도 있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여러 폭로들이 미투 운동의 이름 하에서 이뤄졌다. 그러한 폭로 중에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진 폭로도 있었고, 성폭행이나 성추행으로 불릴 여지가 없지만 다만 개인적인 불쾌로 인해 폭로를 한 경우도 있었다. 미국에서 있었던 배우 아지즈 안사리를 겨냥한 폭로가 후자의 예시 중 하나이다. 그레이스라는 가명을 빌린 한 여성은 과거 아지즈 안사리와의 데이트를 상세하게 전했다. 그와 행복한 저녁 식사를 하고 그의 아파트로 들어가 서로 탈의를 하던 중, 너무 빠르게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고 여긴 그레이스가 거부 의사를 표했다는 것이 폭로의 내용이다. 그레이스는 그의 행동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불편함을 떨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폭로는 엄청난 비판에 휩싸이게 되는데, 주 논지는 이것이 ‘성폭행(Sexual Assault)’이 아닌 ‘나쁘게 끝난 데이트(Bad Date)’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이라인뉴스(HLN)의 앵커 애슐리 밴필드는 “당신의 개인적인 감정에 기댄 폭로가 미투 운동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비판했고, 뉴욕 타임스 역시 ‘아지즈 안사리는 유죄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한 죄(원제: Aziz Ansari Is Guilty. Of Not Being a Mind Reader)’라는 제목의 오피니언을 실었다.
  앞서 미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우리나라의 미투 운동에 재고할 것들을 던져준다. 미투 운동이 익명으로 묶인 여러 사람들의 집단적인 사회 운동이라는 한계를 딛고, 이러한 부작용들을 잘 헤쳐나가기 위해 사회 구성원 모두의 비판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Post #Me_Too
  큰 사회적 물결은 이후의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반성을 수반한다.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정치권은 성폭력 관련 법 제도적 개선과 자성을 다짐하며 ‘포스트 미투’를 약속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낡은 인식과 만연한 성 차별적 구조를 인식하고 사회적 권력이 클수록 변화를 기대하기보다 쉽게 안주해왔던 것들을 깨야 된다”며, 여성폭력방지법 제정과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서 성폭력 관련 부분을 제외하는 법안 마련하는 등 ‘포스트 미투’를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미투 운동이 한시적인 폭로와 가해자 힐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제반을 닦는 주춧돌의 역할이 된 것이다.
  미투운동의 반발로 ‘펜스 룰(Pence Rule)’이 수입되기도 했다. 펜스 룰은 의도하지 않은 성적 논란의 발생을 피하고자 남성이 아내를 제외한 다른 여성과 단둘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신념 혹은 행동 양식이다.
  펜스 룰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모든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사내에서 여성을 비공식적인 교류로부터 원천차단하면, 여성 사원은 정보의 비대칭 등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23일 열린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노동 분야로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여성을 배제하는 펜스 룰로 인해 직장 내 또 다른 성차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며, “정부는 공공기관, 대기업 등에 대한 우선적인 행정지도와 함께 성차별 문제사업장 및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신고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 등을 통해 엄정하게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7년 전, 미국에서 직장 내 성희롱에 징벌적 배상이 가능하다고 판결했던 미국의 선례가 있었다. 이에, 미국의 몇 회사는 남녀 간 사내 데이트를 금지하거나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을 무조건 해고했다. 이 지침이 성 평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과를 낳은 것과 달리, 인권교육 실시, 사내 비공식적 분쟁 해결 기구 설치를 통해 성희롱 예방에 성공한 회사도 있었다. 미투 이후의 사회가 어떠한 방향성을 견지해야 할지 우리는 미국의 선례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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