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신문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한 지 한 해가 지났다. 시간이 참 빨리 흐른다고 생각하던 중, 감상 혹은 사색에 빠졌다. ‘기자 김선규’에 대해.
내가 쓴 기사들이 생각의 표면 위로 떠 오른다. 매 신문 한 켠에 실리는 나의 기사는 미술, 전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글 위에 오른손 검지를 올리고 천천히 읽다 보면 기억나는 뜻 깊은 날이 있다. 밤을 새워가며 기사를 완성했던, 정말 보고 싶은 전시를 관람했던, 혹은 독자에게 질문을 받았던 기분 좋은 날.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보고 있는, 책을 주문할 수 없어 E-북을 읽고 있는, 새벽 1시에 영화를 보러 가 혼자 영화관에 앉아 있는 순간순간을 채우고 있는 기자의 모습. 글은 이 추억을 투영해 주는 매체가 된다. 불현듯 기사 뒤로 얼핏 보이는 풋내기의 모습, 그리고 첫 기사. 한참 신문사 생활을 기대하고 있는 이 기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 활동을 남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기사로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써야 할 기사가 있어 잠깐 사색을 그만두려 했더니, 어느새 어두워진 노트북 화면이 비추는 세상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집중을 끌지 못하는 수많은 사물의 사영 옆에 어떤 기자의 모습만 선명하게 보인다. 희에 차 있던 처음과는 사뭇 다른 표정. 기자는 매번 좋은 기사, 재미있는 기사, 실수가 없는 기사를 쓰기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신문의 1면에 달하는 길이의 기사를 쓸 때면 독자들이 지루해하지는 않을까 고민하며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혹은 전혀 관심이 없던 인디 음악 등을 소재로 기사를 쓰게 되었을 때, 조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아 지치고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기자 수첩을 보고 있는 사람이, 혹은 기자 수첩이 아니더라도 기사를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기자는 다시 Enter 키를 눌러 화면을 켜고 글을 쓰기로 하였다.
나는 이 사색의 끝을 알고 있다. 어느새 기사를 다 쓰고 신문에 넣는 순간,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쁜 감정이 걸어 들어와 나를 가득 채워준다. 이것이면 이미 다 말한 것 아닌가. 그리고 머리를 스쳐 가는 단문들. ‘나는 문화를 좋아하고,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기사를 읽고 있다. 역시나 좋은 일이다.’ 내 마음에 박히는 마지막 문장. 역시나 좋은 일이다. 함께 신문을 만들고 시간을 보내는 카이스트신문 사람들도 생각난다. 나에게 휴식처가 되는 이 카이스트신문 제작편집실도 좋아한다. 꽤 길게 돌아왔지만,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카이스트신문을 참 좋아한다. 신문사 사람들이 참 고맙다.
그래서 나는 442 호에도 여전히 카이스트신문 기자이다. 여담으로 내년에는 문화부 부장이 된다고 한다.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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