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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
[441호] 2017년 11월 14일 (화) 윤지원 학우 (기계공학과 16) kaisttimes@gmail.com

 ‘지난 시간에 배웠는데, 기억납니까?’ 무엇을 배울까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갔건만, 웬일인지 교수님은 정각이 조금 지나서야 강의를 시작하셨다. 평소에는 시작하자마자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리던 강의인데 오늘은 한 발짝 물러나서 놀랐다. 수업시간에 지난 강의를 복습하는 것은 감사히 여겨야 할 교수님의 배려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지난 강의를 경청했다면, 이미 아는 내용을 되짚는 것은 따분하다. 한편 지난 강의를 잘 듣지 않았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겨우 몇 분 다시 본다고 이해가 될 리 없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누구든지 새로운 주제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데 앞에서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실망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기대와 다르게 교수님이 지난 강의를 되돌아보는 사이 나의 정신은 균형을 잃고 서서히 침몰해갔다.
눈꺼풀이 열리자 칠판에는 처음 보는 판서가 적혀있다. 눈을 뜬 건지 아니면 꿈속인지 분간하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눈에 들어온 판서가 가라앉아 있는 의식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다시 눈이 감기려 하는 찰나, 한 줄기 빛이 저 밑까지 내려가 화들짝 놀란다. 잠깐 눈을 감고 쉬었더니 교수님이 벌써 저 멀리까지 내달리셨던 것이다. 수업시간에 강의 내용을 듣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해진다. 특히 문제 푸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경우에는 혼자 익히기도 어렵고, 또 교수님이 알려주시는 방법이 가장 간편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곤란하다. 초록색 칠판에는 흰색 분필로 ①, ②, ③과 같은 순서가 쓰여 있다. 교수님이 아까의 문제와 똑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처음 푸는 것이 아닌 듯하다. 여기서 따라가지 못하면 안 된다. 칠판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알 수 없는 숫자들의 배열과 그림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니 다시 집중이 흩어진다. 흩어지면 안 된다. 다리에 힘을 주어 의자 위로 몸을 살짝 띄웠다. 눈 위아래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부릅뜬 눈으로 보이는 교수님의 입 모양이 점점 희미해진다. 들리는 목소리도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되더니 이내 사라진다. 다리 힘은 조금씩 풀리고 고개가 떨어졌다.
의식도 못한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수업이 끝났다. 느릿느릿 외투를 입고 공책을 하나하나 가방에 넣어 강의실을 빠져나온다. 복도로 나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의식이 조금씩 명료해진다. 오늘 수업은 망했다. 출석도 부르지 않는 수업인데, 이래서야 1시간 반을 완전히 날려버린 셈이다. 그래도 기분이 딱히 나쁘지는 않다. 나는 1시간 반을 충실히 보내려고 나름 노력했다. 내면에 대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마 내 이런 모습을 룸메이트가 본다면 비웃음이나 살 게 분명하지만, 어차피 보지 못했으니 상관없다. 지난주에도, 한 달 전에도, 수업을 들으며 조는 순간은 항상 있어왔다. 그래도 아예 엎드려 잔 적은 없다. 수업을 들으려고 고개를 휘청거리며 열심히 졸았다. 뭐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지만.
언제나처럼 내일은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고 다짐하며, 창의관 밖에 나와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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