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안에 또 다른 내가 사는 게 아닐까. 갑자기 그림자가 나랑 다르게 움직이다가 달아나지는 않을까.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나를 콱 집어삼켜 버리면 어떻게 하지.”
어릴 적 목이 말라 잠에서 깨면, 침실에서 거실로 나와야 물을 마실 수 있었다. 2층 침대에서 조심히 내려와 정수기에서 물을 내려 마시고 있으면 주변에선 시계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말았고 눈앞에는 불에 비친 작은 그림자만 보였다. 약한 불빛에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내 눈에 비칠 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낮에 친구들과 운동장을 뛰놀며 강한 햇살에 의해 생긴 그림자에는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지만, 괜히 밤만 되면 그림자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금방 그림자를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림자가 곧 나를 집어삼키면 어쩌나 벌벌 떨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발에서 떨어지지 않을 그림자를 떼어놓기 위해서 침실로 뛰어들어가 눈을 꼭 감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의 괜한 걱정 때문에 일어난 일말의 소동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만큼 불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죽하면 눈을 감는 것으로 불안이 가시지 않을 때는, 이불로 꽁꽁 감싸곤 했으니까.
우리는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불안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이 삶을 살아가는 내내 불안을 완벽히 떨쳐내지 못한다. 불안이 우리 감정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선택의 순간에 불안은 우리의 뇌리를 스친다. 누구나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잘못된 결정일지 고민하며,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속내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걱정하기도 한다. 이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공포 영화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때, 어두운 밤거리를 혼자 걸을 때 작은 불안을 느낀다.
이런 불안은 일시적이고 대처 가능한 불안인 한편,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 거의 확신할 수 없는 순간 불안의 크기는 훨씬 커진다. 나도 어릴 때는 그림자를 두려워했고 상상 속의 괴물을 두려워했다면, 지금은 결정에 따른 변하게 될 미래의 모습에 있다. 어느 나이가 넘어서게 되면, 비슷한 걱정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현대 사회 도래 이전에는 인간이 신체를 지키는 것 자체에 집중해야 하며 신체의 구속에 대한 불안이 컸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빠른 변화 속에 자신의 존재를 지킬 수 있을지가 가장 큰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정책과 관습의 변화 속에서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지게 된다. 나 같은 경우는 진로, 가정, 유학 등에 대한 걱정과 고민으로 이번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뭉크 특별전을 보게 되었다. 뭉크를 떠올리면, <절규>의 수수께끼 인물을 동시에 상상하게 된다. 다리 위에 일그러진 신체를 갖고 서 있는 그 남자는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몸짓은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크게 뜬 두 눈과 작은 동공은 우리의 눈을 강하게 응시한다. 철저히 고립된 이 인물은 사선으로 그려진 길, 핏빛으로 채색된 하늘 등의 극단적인 구성으로 완벽하게 불안과 절망에 빠져있다. 특별전에서는 <사춘기>를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사춘기 소녀의 불안을 그대로 표현했다. 잠에서 일어난 소녀가 시트의 핏자국을 확인하고 부끄러움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다. 소녀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고, 뒤에는 소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불안과 절망에 대한 뭉크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불안은 평생 떨쳐낼 수 없는 것일까’하고 고민하던 중 전시관 끝에 있는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를 마주했다. 현재를 상징하는 시계와 죽음을 상징하는 침대 사이에서 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이 서 있다. 현세와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곱게 잘 차려입은 뭉크는 결국 덤덤하게 죽음에 대한 불안을 수용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평생 불안에 시달리던 한 예술가가 불안을 겸허히 수용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러니를 느끼기보단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불안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을 마주하면서, 프로이트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그는 불안은 이드와 슈퍼에고 사이의 불일치에서 오는 상태로 생각했다. 욕구와 사회적 요구가 부딪힐 때 우리의 자아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 혼란은 우리의 존재가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부정적으로 해석되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자신이 선택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많은 고민 속에서 불안을 품게 되지만 결국 우리의 불안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불안을 극히 두려워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병적 불안이 되지만, 적절한 긴장감으로 삶의 이유와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나에 대한 고민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크게 진로, 가정, 관계 등을 고민하고 작게는 동아리, 학업 등을 고민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로 귀결된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우리는 틀림없이 불안하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하나씩 해결해가며 우리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그림자를 두려워했던 나를 보며 미소 지을 수 있듯, 우리도 지금의 불안한 모습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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