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기 위해서는 하루가 다 필요해.
하루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나.
하염없이 늘어나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생이 끝나리라는 예감을 해.“
-김보영,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中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사람이 죽는 때는 욕망이 죽는 때다. 욕망이 없어졌을 때,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가족, 결혼, 직장, 기대 같은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억압받지 않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졌을 때, 우리는 그래도 계속해서 살기를 바랄까?

나는 결코 무한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유한하게 살고 싶다.
언어와 죽음, 내 삶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2가지 것들이 오직 내가 유한해야만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유한해야만 가질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어가 좋다. 문학이 좋다.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와, 책을 읽는 시간, 글을 쓰는 시간이 좋다. 나에게 있어서 학점, 취직, 운동, 식사 같은 것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문학, 사랑,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나의 삶의 ‘목적’이다.
만약에 내가 무한하다면, 반드시 언어를 버려야만 할 것이다. 내가 직접 내 삶의 목적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이므로.
무한한 사람에게 기록으로서 언어의 가치는 필요 없다. 감정 없는 껍데기가 될 테니.
나는 무한함 속에서 때때로 사람을 미친 듯이 사랑할 거고, 유한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다 못해 기록할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천년 후쯤 책을 펼치고 그땐 그랬지, 하며 어떠한 티끌만큼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책을 덮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사랑 이야기책을 읽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과거의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나의 과거는 다른 사람의 기록과 전혀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무한한 사람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 언어를 버려야만 할 것이다.
인간으로서도 필요 없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테니. 마치 노인이 되어 아이들을 보면 손바닥 위에 있는 듯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그것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점점 그 누구도 좋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순수하지 못한 마음, 완벽하지 못한 점들이 가릴 수 없이 훤하게 읽힐 거고, 그때마다 미칠 듯 괴로울 테니. 또한 무한한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언어는 죽어가는 것들의 유일한 구원이다.
무한한 것은 옅고 옅어져 희미해진다. 객체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풍경이 된다. 풍경으로서만 무한할 수 있다. 나는 풍경으로서 무한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또한 죽음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한다.
결코 자살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정확히는 죽음을 생각함으로서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다.

나는 왜 살까?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설령 고민해보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이런 질문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늘 무엇엔가 열중한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핑계로 그것들에 열중하며 늘 그것을 생각하길 회피한다. 정신을 놓아주지 않고, 통제한다. 아마 아무것도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지고, 왜 사는지에 관해 고민해야 할 때 사람은 사람으로서 죽는 것이 아닐까.
나는 글 외에는 딱히 좋아하는 것이 없다.
나는 거창한 꿈이나 목표가 없다. 미칠 정도로 재미있는 것도 없다. 이런 나는 왜 살까?

그래서 나는 때때로 무척 열심히 삶을 ‘유지’하는 것들에 열중한다.

이대로 살아가게 되면, 나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변하진 않을 것이다. 어떠한 간절한 목적도 희망도 없는 채로, 그냥 그렇게 살겠구나. 그런 공허함을 달래려, 또는 안심시키려 스스로의 자유를 묶을 것이다. 억압되고, 틀에 갇히고 싶을 것이다. 회사에 다닐 것이고, 월급을 받을 것이고, 결혼을 할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에서 위안을 받을 것이다. 나는 정상이야, 라고 자위하면서. 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은연중에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죽음을 생각한다. 처음엔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 지금 죽는다면 억울한 점은 무엇일지, 오늘 하루는 내 최선이었는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일 죽는다고 해도 할 일인지를 생각한다. 그다음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에게 기대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사회가 만든 틀과 기준을 생각한다. 그렇게 죽음을 상기하고, 나를 환기할 때야 비로소,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진정으로 내 마음이 원하는 것들만을 볼 수 있게 된다.

삶은 짧다. 아직 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반드시 짧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세운 틀과 기준에 기대어 묶인 채로 살고 싶지 않고, 내가 진실로 하길 원하는 것을 알고 싶다. 내 마음이 진정으로 옳다는 것을 매번 선택해나가면 훗날 어느 날엔가 반드시, 옳은 곳에 도달해 있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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