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가 그 동안 이 학교, 카이스트를 다니면서 떠올렸던 생각들을 두서 없이 섞었다. 두가지, 대학에 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느낀 이야기들이다.


첫 번째로, 나는 현재 영화제작동아리에서 연출을 맡고 있는데, 가끔 농담조로 하는 이야기지만 연출이 1000을 준비하면 배우들은 100을 연기해준다. 그러면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을 땐 10정도가 찍히고, 촬영본을 편집했을 때엔 1이 된다.
내가 하고픈 말은 나의 동아리 원들에게 원망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뭔가를 전달하는 과정이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들이 있지만 그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하면 그 의미가 뒤틀려버린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차연(difference)’라 명했고, 나의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은 의미가 ‘미끄러진다’라고 이야기해주셨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땐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상대방도 내 말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하고 수많은 설명들을 붙인다고 한들 남들이 나의 의중을 읽을 수 없다고 느낀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이름이 있고,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기억이 있고, 각자의 가치관이 있다. 이런 상대방의 개인성을 이해해버린 순간, 나는 ‘완벽한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부재가 아닌 상실이기에 남기고 간 빈 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두 번째로 느낀 점은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때 꿈이 있었다. 무엇이든지 가능할 줄 알았다. 나는 남들과는 분명 다른, 나만의 장점이 있고 이 장점이 엄청나게 두드러질 줄 알았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정작 내가 그 장점을 살리려고 하자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내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무리 발악한다 해도 넘을 수 없는 산들이 보였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옛날부터 내 마음 속에 그렸던 이야기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나의 가능성은 무한한 줄 알았는데 이제와 보니 그 가능성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엔 시련이 다가온다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그러지 못한다. 나란 사람을 알면 알수록 내 자신에게 실망해가고 있다.
마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내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내려 간 것 같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투박한 생각을 그대로 쓰고 싶었다.


가끔 사람들을 보면 술에 취해서 자신의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 있다. 이 글도 그런 푸념이다. 누가 읽어줄 지는 모르지만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풀리는, 그런 푸념. 그게 나름대로 묘미 아니겠는가, 가끔씩 써보는 비망록의 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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