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카이스트 문학상] 수필평론 부문 당선작 / 옮긴이의 말
상태바
[제20회 카이스트 문학상] 수필평론 부문 당선작 / 옮긴이의 말
  • 카이스트신문
  • 승인 2015.02.16 16: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옮긴이의 말


박민재(수리과학과 11)

 


“Tradutorre, traditore.”
번역은 반역이다 - 이탈리아 속담.

드디어 수 개월간 작업하던 번역서가 출판되었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이 정교한 작업에 관해, 멋들어진 철학을 곁들여 하나의 장(章)을 덧붙일 법도 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옮긴이를 위한 공간이 없다. 유명한 문학 작품이 아닌 일개 수학 교양서인 데다, 나는 그저 내 전공을 살려 편집자를 도왔을 뿐 숙련된 번역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론을 설파할 수준은 물론, 특정 언어의 미묘함에 대해 논할 깜냥도 되지 않는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경위가 떠오른다. “그쪽 글을 읽어봤는데, 그 책 번역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오래전 한 책을 읽고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부분을 발견해 취미 삼아 번역했던 것을, 판권을 가진 출판사에서 읽고 연락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머리를 굴려보니, 흔치 않은 경험이거니와 내 전공과 관련된 책이니 굳이 해가 될 건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한 번 읽었던 책이겠다, 영어공부나 할 겸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겠노라 대답을 하고 출판사에서 읽었을 내 글을 다시 꺼내보았다. 취미 삼아, 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 10장도 채 안 되는 글을 번역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지. 유명한 학자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조언을 인용 형식으로 붙여놓은 짤막한 글이었다. 우스울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게 가장 힘들었던 선택은 정작 어려운 문장을 어떻게 고칠까도, 혹은 어떤 적절한 단어를 선택할까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 글을 존댓말로 써야 하느냐였다.
영어에는 존칭이 없다. 그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 나에게 드러내는 바는 너무도 명확했다. 요컨대 저자인 Michael과 나의 입을 빌려 말하는 마이클 씨는 절대 같은 인물일 수 없다.
마이클 씨를 상상해본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민재 군,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 그의 표정은 온화하며, 천천히 나에게 맥주잔을 건넨다. 아니다, 다른 마이클 씨는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 “당신은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나를 존중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단지 호칭만으로 머리에 각인되어 있는 첫인상이 얼마나 많은가? 개인이 오직 “야”로만 통용되던 군대에서, 어떤 상사가 우리 분대를 집합시켜놓고 얼차려를 줬던 날을 기억한다. 그는 우리에게 “당신들”이라 호통치며 혼내는 한 시간 내내 높임말을 썼다. 2년간의 군 생활에서 그에 관한 기억은 오직 그 하루뿐이건만, 찰나의 순간 느꼈던 “당신”이라는 호칭의 낯섦과 의미는 아직도 생생하다.
짧은 글을 읽고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에 영어에 대한 내 조예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Michael의 다른 글, 그의 인생, 살아온 환경과 배경을 조사해 보았다. 그는 토종 영국인이다. 그렇다면 내가 모를 미묘한 정중함을 지니지 않을까? 이는 허황한 상상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러한 느낌이 하나둘 쌓여 마이클 씨가 만들어졌다. 존댓말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Michael과 나 사이의, 더는 실존하지 않는 어떤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일단 그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나서, 내가 할 일은 그저 마이클 씨의 말을 받아 적는 것뿐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누구나 번역자라는 것을. 심지어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개개인은 모두 자신만의 어휘와 문법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일련의 경험들로부터 ‘번역’이라는 단어에 부여하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하기란 힘들 것이다. 친구, 영혼, 사랑, 절망, 등등,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정의(定義)를 가진 단어들을 나열하기란 어렵지 않다.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상대방에게 건네줄 각자의 단어장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언젠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친구가 “당신은 나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 부담스러워.”라며 이별을 통보했다. 나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것과 ‘부담스럽다’는 단어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 형태로도 드러나지 않고 오직 머릿속에서, 혹은 말이나 글을 통해서만 존재했던 ‘의미’가 어떻게 확고한 형상을 띠어 그녀를 괴롭힐 수 있었단 말인가?
그녀의 말은 나에게 그 어떤 암호보다 더욱 수수께끼 같았고,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언어로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생각해보면, 타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번역의 행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는 나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되어버리곤 한다. 나는 그녀가 모종의 이유로 남자친구와 보다 가벼운 연애를 원했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상상하는 그녀는, 진짜 그녀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형편 없는 역자였던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주로 초벌 번역을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다. 타인의 결과물을 원본과 자세히 대조하는 일은 예상외로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맞춤법 규정이나 사전에 명시된 용례에 따라 문장을 다듬으면 되는 수동적인 작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명백한 오역과 같은 언어적 요소를 제거하면, 문장에는 역자의 가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규칙이 아닌 미학의 영역이었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 과학 서적이므로, 독자의 이해를 위한 쉼표를 함부로 없애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한 문장에 쉼표가 대여섯 개 있던 것을 지우고 난 뒤 성난 역자로부터 받았던 회신이다. 원래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 미적 가치가 옳음을 증명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번역에 관한 수많은 철학과 이론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책을 읽을 때마다 한 번도 훑어보지 않았던 맨 뒤 옮긴이의 말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어떨 땐 저자에게서 직접 마음을 찌르는 구절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보코프는 러시아어 판 《안나 카레니나》 시작 부분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여섯 줄 속에 여덟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작가가 일부러 공을 들여 그렇게 쓴 것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프랑스어 번역판에는 ‘집’이라는 단어는 한 번밖에 나오지 않고 체코어 번역판에도 두 번을 넘지 않는다. 같은 책에서 톨스토이가 skazal(말했다)이라고 쓴 곳마다 번역자들은 ‘말했다’, ‘발설했다’, ‘되풀이했다’, ‘소리쳤다’, ‘결론지었다’ 등으로 바꾸어 썼다. 번역자들은 동의어를 찾는 데 혈안이다. (나는 동의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단어들은 각기 특유한 뜻을 지녔으며 그 의미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은 의미론적으로 불가능하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한 문장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어 그것을 고치려다 보면 그 말이 워낙 고유해서 문장 자체가 엉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것이 특징이다.”
《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민음사.
쇼팽이 영국에서 체류할 때 가장 듣기 싫은 찬사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음악을 공부할 때 사람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화음이 다르며 그로 인해 음악적 취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다수에게 불협화음으로 들리는 음의 조합도, 비슷한 음악을 자주 듣는 사람은 가상의 음을 연상해 협화음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런 음악은 마니아적이다. 드물긴 하지만 시대의 가치에 따라 대중들이 선호하는 보편적인 곡의 구성이나 화음의 진행 자체가 달라지기도 한다.
글이 단순히 객관적인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체에 불과하다면, 번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것을 왜곡 없이 전달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글에 담긴 것이 초월적 관념이 아닌 개인의 표현이라면, 전달하는 방식 또한 그 표현의 일부가 된다. 소설가들에게 글의 형식적 가치와 의미적 가치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베토벤이 두 악장으로 된 소나타로 기존의 틀을 깨며 이야기하려 했던 바는 그의 음악이 주는 전율과 별개가 아닐 것이다.
다행히 학문적 가치는 소설의 경우처럼 언어적 요소에 의해 크게 훼손되지는 않는다. 마치 영화의 핵심은 영상 속에 있으며, 자막의 형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곧 학문의 보편성과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가치가 대사 하나하나보다는 전체적인 구성과 영상미에 의존하듯, 수학적 가치는 어떤 개념을 풀어내는 방식과 수식의 표현에 의존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학문에서 우리가 배우고 깨닫는 것은 다름 아닌 그것이다. 어떠한 가치도 고유한 미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사실 번역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원문의 저자는 학문에 대한 자신의 독창적인 이해를 수식과 언어로 풀어낸, 진정한 역자이기도 했다. 이 경우 번역자가 유려함을 포기하면서까지 용감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미학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해한 순간, 무거운 책임감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때때로 발견하는 웃지 못할 오역은 사전의 무용(無用)을 역설했다. 언어에 능통한 전문가조차 단어와 단어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번역은 오직 단어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번역은 문장 그 너머의 대상에 대한 인식과 애정을 필요로 한다.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리라.
사람이란 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타인에게 전달해야 하는 번역자이다.
자아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다. 확신 없이 함부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 두려웠다. 스스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래서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한한 공허함에 관한 어떠한 실마리라도 붙잡고 싶었다. 하루는 감정에 벅차올라 나의 여러 모습을 묘사했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 형상은 더는 내가 아닌 듯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한 달이 지난 후 나에게 남아있던 것은 백지뿐이었다.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의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원래의 대상을 왜곡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의 글을 노려보며 불만에 가득 찬 어린 시절의 나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드러나는 것은 내가 아닐지언정, 그 시도를 통해 나는 해방된다. 나와 나 사이의 나, 인간이 절망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바벨탑의 저주, 이제 그 존재를 담담하게 마주하기로 한다.
마침내 여기저기 나의 손을 거친 번역서가 출판되었지만, 그것은 나의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일을 하며 내가 번역하고 옮긴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