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우의 죽음을 염(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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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우의 죽음을 염(念)하며
  • 카이스트신문
  • 승인 2014.12.0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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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 학우 (산업및시스템공학과 11)
사건을 접한 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대마다, 문화마다 자살의 함의는 다르다. 한국에서 자살은 전통적으로 '최후의 저항'으로 통했다. 민영환의 자결이나 전태일의 분신도 그러하지만 보통 이러한 행위들은 '절망'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겠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근대에는 그런 자살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서 '절망과 체념의 몸부림'으로 변해왔다.
 
자살률이 가장 낮은 나라들을 보면 대다수는 빈국들이다. 자살이 거의 없는 네팔이나 10만 명당 자살자가 1명에 불과한 이집트에서는 왜 사람들이 죽지 않을까? 이러한 나라들을 보면 부유한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산업화가 완료된 나라도 거의 없다. 자살 관련 의학 논문을 보면 자살 위험이 가장 큰 환우는 우울증 환자 분들이고 한국의 경우, IMF 후 신자유주의가 진행되는 속에 우울증 환자 비율도 연간 약 4%의 증가율을 보여왔다. 눈부신 산업발전과 우울증의 확산은 정비례하는 셈이다.
 
징벌적 등록금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 안 하면 큰 통증이 온다는 등식을 그 "매"라는 약을 뇌리 속에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다. 이 '자발적 공포'는 이미 일반화 된 지 오래다. 몇 명의 낙오자가 자살하든 미치든 학교의 경쟁력, 나아가서 대한민국 전체의 경쟁력이 강화되기만 하면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이미 학교에 자리 잡았고 우리 스스로도 일단 시험부터 막고 보자는 행동양식으로 훌륭하게 내재화시켰기 때문이다. 사회에 호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특히 서남표 전 총장님이 부임한 이후 급격히 '원자화'된 이 캠퍼스 안에서는 사실 공동체니 뭐니 하는 것은 이미 없이 그 폐허만 남았고 딱 하나만 남았다. "취직하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 잘 살고 싶다" 여기에 포함되는 공동체의 범주는 가족이나 여자친구 정도가 포함될 수 있지만 딱 그것 뿐이다. 그 바깥에서 어떤 비극이 일어나든, 정의가 이루어지든 말든 나의 관심사는 전혀 아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언제부턴가 "관계"가 아닌 "거래"가 되었다. 소외된 개인 간에 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까운 "친구 관계", 미래의 소득을 위한 공부, 대인관계도 서로 당기고 밀어주고 적당히 아픈 구석 만져주고 스트레스 풀어주는 거래, "아침에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식의 지적 쾌락 같은 것들이야 이미 원시시대 이야기가 되었다. 자살률이 낮은 네팔 등은 아직도 전통 사회의 공동체성이 강하게 남아있다. '우리'라는 개념이 파괴된 지금, 강성모 총장님은 칠전팔기의 도전정신을 강조하는 "꿋꿋한 개인"이 되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개인이 있다 한들 옆에 친구가 빌딩에서 떨어지고, 번개탄을 마시는 캠퍼스에서 과연 원만하게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산 자에게 죽음에 대한 예의는 무엇일까. 공학도인 나에게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타자의 죽음은 무엇보다 무섭고 두렵다. 결국, 죽음을 대하는 예의로 우리 모두 죽은 이가 겪었을 그 고(苦)를 염(念)하고 친구들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무력할지라도 작은 원(願)을 내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자살 행렬을 멈추려면 우리는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타인을 향한 책임을 동시에 절감하는 진짜 '개인'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사회가 만들고 우리가 거들고 또 빠져있는 연옥 속에서 목숨을 끊은 학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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