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여학생이 세상을 떠났다. 세 학과의 복수전공을 하느라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하루에 겨우 두 시간만 자고 공부를 했다고 하니,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리가 없다. 공부는 과중한 짐이자 몸을 짓누르는 돌덩이가 되었다. 왜 학문이 이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이 학생이 공부를 힘들게 느끼도록 했는가?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다던 공자의 학문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5살짜리 어린아이가 영어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생이 미적분을 배우는 나라에 살고 있다. 책상에만 앉아 있어 살이 찌는 ‘고삼병'이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내일이면 전국의 모든 수험생이 소위 명문 대학교에 합격하기 위해 우열을 다툴 것이다. 시험이 끝난 후에는 배치표라는 이상한 표를 가져다 놓고 좋아하는 학과가 아니라 자신의 점수로 갈 수 있는 학과와 학교를 고를 것이다. 대학생도 상황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학벌, 좋은 학점, 뛰어난 ‘스펙’으로 다른 사람보다 위에 올라서야만 취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며, 그 약육강식의 정글이 펼쳐지는 무대가 바로 여기다. 어느새 학문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이 모든 것은 무엇 때문이며, 누구의 책임인가. 경쟁을 전제로 한 상대평가가 이 중심에 있다. 학생이 학문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가 아니라 단지 줄을 세우기 위해 시행하는 시험. ‘변별력’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위해 책 구석구석,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며 주석까지 전부 뒤져 나오는 시험을 보면서 학문 탐구를 기뻐할 수 있겠는가? 100점짜리 시험에서 50점을 맞아도 남보다 앞서기만 하면 된다는 현실에서, 학문의 본모습이 뿌리내릴 수 있을 리 없다. 공부라는 검을 서로에게 겨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학문은 즐거운 탐구가 아니라 남을 찌르고 내가 살아남기 위한 무기가 된 것이다.
모든 경쟁이 없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경쟁심은 개인의 선택이다. 경쟁을 하고 싶으면 경쟁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공부하면 된다. 하지만, 상대평가를 위한 시험은 학생에게 강요된다. 줄을 서기 싫어도 억지로 세워진다. 반드시 경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상대평가의 경쟁이 부조리한 것은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나도 학생으로서 즐겁게 공부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간고사 결과를 붙여놓은 벽보를 보고 내 점수가 평균보다 얼마나 높은가를 따져 가며 좋은 학점을 갈구하는 내 모습에 괴리감을 느낀다. 기쁘게 공부하고, 내 학문이 어디까지 다다랐는가를 평가받고 싶지만 상대평가의 벽 앞에서는 이 꿈을 이룰 수 없다. 올바른 의미의 학문이 상아탑에 돌아올 날은 언제인가. 배우고 또 때로 익혀 즐거우려면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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