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철 작가]

 카이스트에 머문 50일 동안 다양한 구성원들을 만났다. ‘사이언티스트’ 또는 ‘과학도’라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곳에서 ‘아티스트’ 또는 ‘작가’로 불린다. <엔드리스로드-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이곳 캠퍼스에 머물고 있다. 과학과 예술의 교류로 이른바 ‘융합’을 모색해보자는 기획이다. 알다시피, 요즘은 어딜 가나 융합이 대세다. 믹스, 블렌드, 퓨전, 컨버전스, 하이브리드, 시너지, 크로스오버…… 등등, 단어만 약간 다를 뿐, 이종교배를 해서 뭐가 나오는지 보자는 뜻이다, 대략.

과학도들을 만나면 두 가지 시선을 느끼게 된다. 신기한 눈빛과 의심스런 눈빛. 첫 번째 눈빛은 이해할만하다. 통계청 자료를 굳이 안 봐도, 예술 종사자는 과학 종사자보다 희박에 가까울 만큼 소수이다. 그러니 희귀동물 관찰하듯 바라보는 눈빛, 십분 이해하고 있다. 두 번째 눈빛은 ‘저 사람도 과학을 알까?’ 하는 탐색의 눈빛이다. 이 자리를 빌려 오해를 풀자면, 작가는 깊게는 몰라도 잡다하게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과학자가 깊게 파고드는 사람이라면, 작가는 넓게 늘리는 사람이다. 어차피 둘 다 ‘삽질’이지만, 삽질의 방향이 좀 다르다고나 할까?

삽질의 융합. 나는 이게 카이스트에서 예술가들을 초청한 취지라고 생각하며, 나 또한 이 취지에 적극 동조한다. 삽질에 수직삽질과 수평삽질이 있듯이, 사고에도 수직사고와 수평사고가 있다. 한정된 틀에서만 생각하는 게 수직사고라면,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하는 게 수평사고다. 이곳 학생들을 만나면 관심사가 너무 좁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과학도답게 모든 걸 ‘합리적으로’ 따지려는 경향도 있다. 합리가 과학의 척도일 수는 있겠지만, 인생의 척도는 아니다.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과학 또한 더 나은 인생을 위한 학문이다. 그리고 모든 학문은 창조 단계에 이르면 합리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내 임무를 ‘학생들 망가뜨리는 일’로 잡고 있다. 전혀 다른 합리도 존재한다! 그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다. 예컨대―

여기 캠퍼스에는 길고양이들이 많다. 그래서 저절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리게 된다. 고양이가 50% 확률의 생사 장치를 단 상자에 갇혀 있다. 상자에는 50% 살았거나 50% 죽은 고양이가 들어있는 게 아니라, 뚜껑을 여는 순간 생사가 확인될 뿐이다. 잘 알다시피, 양자물리학의 유명한 가상실험이다. 이럴 경우 예술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고양이를 상상한다. 좀비 고양이, 유령 고양이, 투명 고양이, 반 토막 고양이, 플렉서블 고양이…… 등등. 심지어 확률의 최대치가 왜 꼭 100%여야 하는지조차 불만을 품는 게 예술가들이다. 비합리적이어서? 아니다. 다른 합리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의 위대한 탐구와 발견은 합리에 목맨 결과가 아니라, 합리를 부숴서 새로 만든 결과물이다.

나는 이곳에 머물며 학생, 연구생, 교수님 들을 되도록 많이 만나고 싶다. 사실 예술가들은 너무 심하게 망가져 수리가 좀 필요한 사람들이다. 엉뚱하고 황당한 공상만 하며 살다보니, 때로는 어디가 망가졌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런데 수리를 받고 싶어도 잘 만날 수가 없다. 학생들은 왜 그리 학점에 연연하는지, 연구생들은 왜 밥 사주겠다는데도 안 나타나는지, 교수님들은 왜 자기 분야 얘기만 잔뜩 쏟아놓고 뿅 사라져버리는지, 내 우주에서 보면 괴이한 현상들이다.

‘음, 여기는 시간 속도가 다른, 휘어진 공간인가 보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적용하여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이곳 시공에서 나는 다른 우주에서 온 사람, 곧 외계인이다. 남은 바빠 죽겠는데, 오리호숫가에서 한가로이 그네 타며 노는 사람. 이런 외계인 만나보고 싶지 않은가? 다른 우주도 있다! 물리학도라면 너무 당연시할 상식이겠지만, 그 우주가 지구에만 70억 개쯤 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우주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며, 그래서 ‘융합’이 필요한 것이다. 깊게, 넓게, 인간스럽게 살기 위하여.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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