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유호정 기자
일러스트 | 유호정 기자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 『느낌의 공동체』(신형철, 2011)

이 글은 다른 사람의 느낌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공감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러한 공감 능력은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공감하는 인간 :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공감이란 무엇일까요? 통상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를 공감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한가지 공[共]에, 느낌 감[感]을 쓰는데, 이를 합치면 ‘당신과 내가 함께 하나로 느낀다’라는 근사한 의미가 됩니다.

‘공감’은 일상적이기에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이의 아픔과 고통, 기쁨과 분노에 우리는 손쉽게 공감하니까요. 그러나 찬찬히 곱씹어보면 공감이라는 개념에는 온갖 의문점이 가득합니다. 모든 기능은 구조와 기전을 필요로 하는데, 그러면 공감이라는 기능은 어째서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여, 친구의 사적인 고민을 제 일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따금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동화되곤 합니다. 이러한 감정의 전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일단 우리는 왜 공감하는 것일까요? 공감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굳이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여 다른 개체의 마음을 헤아리는 행위니까요. 이러한 공감은 어떤 진화론적 이점이 있을까요?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을 공감의 동물로 규정하고, 우리 모두 호모 엠파티쿠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은 어떤 공감이어야 할까요? 

정서적 공감, 인지적 공감, 그리고 한계에 관하여

뒤에서는 위에 언급된 질문에 대응하는 내용을 다룹니다. 전체 글의 자세한 흐름과 요약을 먼저 소개합니다.

첫째로 자동적·정서적 공감에 대해서 다룹니다. 자동적·정서적 공감에는 거울 뉴런이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며 이 덕분에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동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준의 공감은 동물에서도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로 인지적 공감 능력에 관해 다룹니다. 이 능력은 다른 유인원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이와 관련된 ‘사회적 뇌 이론’을 소개하는데, 해당 이론에서는 인간의 인지적 공감 능력을 복잡한 사회성에 대응하기 위한 적응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보통 공감은 협력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당 이론에 따르면 마음 읽기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협력의 이면을 위해서도, 즉 상대방을 속이거나 상대방의 속임수를 파악하기 위해서 마음 읽기가 필요했다는 주장입니다. 

셋째로 정서적 공감의 한계를 지적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짧게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것은 인간의 기본 습성이며, 우리는 수많은 분류로 집단을 나눕니다. 한편, 집단을 묶기 위한 방법으로 언급되는 정서적 공감은 스포트라이트와 같아 강렬하지만 한정된 공간만을 비춥니다. 그 특성상 전체 집단을 통합하는 해결책이 되기에는 어려우며, 오히려 내집단에 대한 강한 정서적 공감은 집단 간의 갈등과 차별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에 강조되는 정서적 공감이 아니라, 인지적 공감이 ‘호모 엠파티쿠스’가 추구해야 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과학철학자 장대익 교수의 “공감의 깊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감의 넓이가 중요하다”라는 말로 대표됩니다. 이에 더 나아가 두 주장을 절충하는 방법이 없을지 묻습니다.
 
거울 뉴런과 정서적 공감

우연한 사건을 통해 공감의 신경학적 기반에 대한 일차적인 해답이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거울 뉴런(Mirror neuron)입니다. 거울 뉴런은 약 30년 전,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교 신경과학 연구팀에 의하여 규명되었습니다. 연구팀이 뇌에 전극을 꽂고 행동을 연구하던 도중이었습니다. 연구팀은 원숭이가 손아귀를 쥘 때 활성화되는 F5 영역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때 원숭이는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아이스크림을 쥐고 연구실로 들어오는 연구원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추가 연구를 통해 파르마 연구팀은 최초로 거울 뉴런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울 뉴런은 다른 개체의 행동을 볼 때 우리 자신의 뇌에서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를 말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인식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직접 특정 행위를 할 때도 같은 세포가 동일하게 활성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거울 뉴런의 작용을 일종의 시뮬레이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어떤 행위를 보기만 해도, 내가 직접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동일하게 뇌가 반응하는 것이지요. 기작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울 뉴런은 특정한 행동을 하기 전에 운동을 계획하는 전운동영역에 존재하는데, 전운동피질(Premotor Cortex, PM)과, 하전두회(Inferior Frontal Gyrus, IFG)가 전운동영역에 포함됩니다. 원숭이의 경우 전운동영역의 약 10%가 행동을 관찰할 때 반응하는 거울 뉴런입니다. 이러한 전운동영역은 보조 운동영역(SMA; Supplementary Moter Area)이라고 불리는 뇌 영역과 함께 특정한 행동을 수행하기 전에 작동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운동을 순서에 맞게 계획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해당 영역에서 직접 몸을 움직이고 근육을 통제하는 일차 운동피질 M1에 전기 신호를 보내어 운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통적 해석 방법으로 보면 뇌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뒷부분은 세상을 지각하며, 앞부분(M1, PM, IFG, SMA)은 운동을 계획하고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거울 뉴런은 감각 대 운동, 입력 대 운동이라는 도식에 그렇게 깔끔하게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위에서 보았듯 과거 전통적인 관점으로는 상대방의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측두시각피질 영역이고, 전운동영역은 자발적 운동을 계획할 때만 활성화된다고 믿어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어째서 거울 뉴런은 지각과 운동을 같이 수행하는 오묘한 역할을 수행할까요? 초기 거울 뉴런을 연구한 과학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케이셔스는 이러한 거울 뉴런의 중복되는 특징을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누군가가 움직이는 장면은 따지고 보면 단순한 시각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느낌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거울 뉴런을 통해 우리 자신의 행동과 연결하면 시각 체계가 감지한 이미지에 의미가 추가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시각 정보에 해석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첨가한다면, 이제 내가 보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추상적 인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즉, 크리스티안은 거울 뉴런이 나의 운동과 감각적 이미지를 결합하여 감각 체계가 포착해 낸 신호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다고 주장합니다.

거울 뉴런 덕분에 우리는 허술한 신파극에서도 눈물을 흘립니다. 이유를 몰라도 울거나 화나는 얼굴이 앞에 주어지면 감정이 요동칩니다. 거울 뉴런이 밝혀진 이후, 몇몇 과학자는 거울 뉴런이 연민과 공감의 생물학적 기초를 형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콜 제이(Cole J)는 실제로 타인의 표정을 잘 따라 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 사례는 운동 영역인 거울 뉴런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윌리엄스(JH Williams)의 연구에 따르면 거울 뉴런의 이상이 자폐증의 주요 증상인 공감 능력 부재의 원인일 수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거울 뉴런은 인지적인 노력을 쏟기 전에, 뇌에서 자동으로 작동하는 공감 회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이의 눈물을 보기만 해도 같이 슬퍼지는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의 거울 뉴런이 일종의 공감 기본값으로 작동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울 뉴런을 하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취급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점입니다. 거울 뉴런 하나만으로 공감, 운동 이해력, 모방 능력 등의 신비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경계해야 합니다. 현재 신경과학계에서는 거울 뉴런 시스템에 대한 연구 성과가 과도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주장이 적지 않습니다. 거울 뉴런이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 단초임은 확실하지만, 상위 단계의 단일 기작으로 행동의 원리가 설명되리라 믿는 것은 신화에 가깝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추론하는 능력과 인지적 공감

또한, 우리는 추론하여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 공감, 즉 거울 뉴런을 기초로 한 자동적 공감 능력 말고도, 인간에겐 의도적으로 노력하여 공감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을 추론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심리학자들이 ‘마음 읽기’, ‘마음 이론’이라고 설명하는 현상에 해당하며, 다른 말로는 ‘인지적 공감’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시를 들겠습니다. 원숭이와 인간이 야밤에 같이 산책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누군가 달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을 때, 인간은 ‘달’을 보는 존재이지만 원숭이는 ‘손가락'을 보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역지사지의 능력은 영장류 중에서도 인간에게만 있는 독특한 능력입니다. 운동 자체를 이해하는 건 다른 동물도 할 수 있지만, 행위의 목적과 방법을 이해하는 인지적 공감은 인간 사회성의 독특한 측면 중 하나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인간은 누군가와 접촉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동식물, 나아가 사물까지도 공감하곤 합니다.

그러면 의문이 듭니다. 왜 이러한 인지적 공감 능력을 발전시켰을까요? 즉각 주어지는 감정과 달리, 예측과 추론은 의도적으로 인지적 자원을 사용해야 하는 몹시 성가신 과정입니다. 또 귀한 에너지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생존과 관련된 다른 정보를 처리할 기회를 포기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유독 상대의 감정과 의도에 민감한 존재로 진화했을까요?

인간의 진화와 사회성의 관계를 연구한 인류학자들은 인류 진화의 독특성을 뇌 크기에서 찾습니다. 인간의 뇌는 1,300~1,500cc 정도로 다른 영장류에 비해 압도적으로 큽니다. 일부는 뇌 크기와 집단의 크기는 비례하며, 확대된 집단에 대응하기 위해 뇌가 진화, 특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사회적 뇌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해당 이론은 흥미롭게도 인간의 뇌가 큰 틀에서의 사회성을 위해 커졌다고 주장합니다. 자연환경에서의 생존보다는 집단에서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커졌다고 보는 것이지요. 집단의 크기에 따라 요구하는 사회성의 정도가 다릅니다. 작은 집단에서는 원숭이처럼 털을 골라주는 방법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집단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큰 인간의 경우, 언어와 마음 읽기 능력을 발달시켜 사회적 문제에 대처해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높은 수준의 인지적 공감, 다시 말해 ‘마음 읽기’는 인간만이 가진 공감 능력이며, 이는 복잡한 사회성에 대한 적응 기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공감은 순진하게 집단에 협력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권모술수를 위해서도 진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상대방이 속임수를 읽고 이에 대응하는 것이지요. 즉, 마음 읽기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느낌의 공동체 vs 사고의 공동체

지금까지 두 개의 공감 시스템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위에서 소개한 내용은 하나의 관점일 뿐, 실제로는 공감의 정의와 접근하는 관점에 따라 학자마다 분류 기준이 상이한 경우가 많기에 유의해야 합니다. 실제로 제이 레비(J Levy) 같은 학자는 이분법의 분류에서 벗어나 세 가지의 단계로 공감을 분류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아직도 공감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다만 글의 앞부분에서 소개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최근 제시되는 정서적 공감의 한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합니다. 

과거 제44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우리 사회에 공감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로 던져 많은 이의 호응을 얻어냈습니다. 공감은 정치권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단어입니다. 흔히 공감은 도덕 문제와 사회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특효약처럼 다뤄지곤 합니다. 마치 모든 선하고 좋은 것과 동치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한편 일각에서 몇몇 학자는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들은 가족에게 친절해지라는 격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공감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이 세계 평화와 보편적 정의의 수단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정서적 공감으로 연결될 수 있는 집단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이들의 핵심 주장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내집단에게만 강한 정서적 공감을 할 때, 오히려 외집단을 악마화하고 배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라인홀드 니버는 세계대전을 겪으며, 도덕적 인간이 모인 집단에서 어째서 잔혹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고 분석합니다. 그 결론은 도덕적 인간이 벌이는 집단을 위한 이타적 행위는 집단 단위에서의 비도덕성과 이기심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버의 통찰은 최근 인류학의 연구를 통해 뒷받침됩니다. 학자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와 그들’로 편을 가르려는 태도는 우리의 오래된 본능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버드대학교 인간 진화생물학과 교수 리처드 랭엄은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에서 인간 폭력성의 독특한 이면성을 언급합니다. 우선 랭엄은 낡은 선악의 이분법을 탈피하고, 인간의 악함이 발휘되는 구체적인 지점에 집중하여 논의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악함이 표출되는 폭력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반응적 공격’과 ‘주도적 공격’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주먹 다툼과 같이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원인으로 일어나는 공격을 지칭하고, 후자는 계획적이고 치밀한 공격을 지칭합니다.이제 이 분류를 토대로하는 랭엄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핵심 명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은 ‘자기 길들이기’를 통해 스스로 가축화되었으며, 핵심 수단은 사형이었습니다. 그 결과 내집단에 대한 반응적 공격이 줄어들었지만, 외집단에 대한 주도적 공격은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랭엄이 최종적으로 그리는 시나리오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진화함에 따라 내집단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하지만 외집단에 대해서는 한없이 사악한 종으로 나아갔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폭력 같은 극단적인 상황 말고도, 내집단과 외집단에 있어 편향과 도덕 미화는 꾸준히 관찰되었습니다. 우리의 공감은 공감 대상이 친구인지 아니면 적인지에 민감합니다. 공감 대상의 겉모습이 근사한지 아니면 보기에 역겨운지 등에도 예민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공감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공감하고 편을 든 뒤에 그것을 도덕적으로 미화하여 믿는 것일지 모릅니다. <공감의 배신>을 쓴 폴 블룸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러한 정서적 공감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곳을 환히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와 같습니다. 스포트라이트는 밝지만, 그 빛을 비추는 면적이 좁습니다. 정서적 공감은 그 깊이는 뛰어나지만, 반경에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관련하여 장대익 교수의 비유를 들고자 합니다. 그는 공감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깊이가 아니라 반경이라고 말하며,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유에 활용한 것은 ‘공감의 동심원’이라는 말입니다.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감의 동심원’이 확산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우리의 공감 능력이 닿는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의 특수 집단에서 인간의 전체 집단으로, 그리고 지금은 인간 너머로 그 동심원이 향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장대익 교수는 이 말에 빗대어 공감의 두 방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공감의 동심원을 넓고, 깊게 하려면

지금까지 인지적 공감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공감의 원심력을 늘리자는 깔끔한 주장으로 모든 논의를 끝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우리’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정서적 공감만을 늘리는 것으로 사회의 갈등이 전부 해소되리라 기대하는 건 순진한 믿음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결국 찾아야 하는 건 내집단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외집단을 비인간화하지 않을 방법입니다. 인간에게 도덕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집단에서는 도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 가족, 내 고향, 내 학교, 내 국가는 소중합니다. 다만 한 집단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이와 경쟁하는 외부 집단을 동시에 포옹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양가 감정은 이미 익숙합니다. 대표적으로 애국심이 있습니다. 애국심에는 필연적으로 배타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경쟁하고 갈등하는 나라를 미워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애국심에 관해서는 르낭과 피히테, 그리고 톨스토이 등이 이에 관해 역설한 바가 있습니다. 

독일 철학자 요한 피히테는 ‘살아 있는 언어’를 토대로 민족이 구성되며, 이 민족의 발전과 개선에 대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참된 애국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에는 애국심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가가 장려하여 이러한 마음을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며, 이는 전체주의의 일부분으로 편입되었습니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애국심이 인간에게 해로운 관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잘못된 애국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심 그 자체를 악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인류가 겪는 고통 중 많은 것이 애국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파멸적인 세계 전쟁 같은 것들이 말이죠. 때문에 톨스토이는 애국심 자체를 이성으로 근절해야 하는 사악한 감정이라고 주장합니다.

한편 프랑스의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속하고자 하는 의지를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이며, 애국심은 그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애국심은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 아니며, 전쟁의 원인 또한 애국심이 아닌 정치 제도에 있습니다. 귀속하여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랑과 충성심이 애국심의 근간이라고 본 것입니다. 

각자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분열과 갈등을 해결할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서로 나누고 차별하고 사랑하고 피흘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진화적 한계가 만든, 숙명적인 딜레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감의 원리, 그리고 폭력의 원리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를 그대로 사랑하면서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다른 해답을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문헌

<사회성, 두뇌 진화의 비밀을 푸는 열쇠> 로빈 던바 그 외, 처음북스 (2016)
<울트라 소셜> 장대익, 휴머니스트 (2017)
<공감의 배신> 폴 블룸, 시공사 (2019)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소소의책 (2019)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공감하는가> 크리스티안 케이셔서, 바다출판사 (2018)
<사회신경과학으로 보는 공감> 장 데서티, 박영사 (2020)
<공감의 반경> 장대익, 바다출판사 (2022)
<거울 뉴런 이야기> 크리스티안 케이셔스, 바다출판사 (2023)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 리처드 랭엄, 을유문화사 (2020)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문예출판사 (1932)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돌베개 (2017)
<About Face>, Cole, J.,  The MIT Press (1999)

Imitation, mirror neurons and autism, Williams JH et al., Neurosci Biobehav Rev (2001)
Embodied Cognition and Mirror Neurons: A Critical Assessment, Caramazza et al., Annu Rev Neurosci (2014)
Graded Empathy: A Neuro-Phenomenological Hypothesis, J Levy et al., Front Psychiatry (2020)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