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새내기 후배가 “형이랑 제일 친한 사람은 몇 명 정도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어진 일순간의 고민. 기억은 흐릿하지만 “KAIST에 함께 온 고등학교 동기 서너 명이 있는데, 분기에 한 번쯤 보는 것 같아”라고 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그게 친한 게 맞냐는 듯한 의심의 눈초리였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논고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때의 내가 답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고, 그리하여 삶에 여유가 틈입하던 설 연휴 즈음에 친구 중 하나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대강 ‘우리처럼 가끔 보는 사이면 안 친한 사이냐’, ‘좀 더 자주 봐야 하나’는 식의 대화가 오갔다. 묵묵히 듣고 있던 그 친구는 “오랜만에 봐도 안 어색하니까 친한 거다”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탄환(癱瘓)에 걸린 것 마냥 인간관계의 상당수는 불구가 되었다. 학교에 오래 다닌 만큼 우이로 마주치는 사람은 더러 있지만,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는 셈으로 아물리는 것이 예사였다. 한데 결속시키던 고리가 끊어지고 난 후에는 각개 전투를 마주했고, 이는 누군가를 탓할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유장한 시간만이 축적되었을 뿐’이다.

압닐하다 해야 좋을 친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찰나로 기록된 새내기 시절을 돌아보면 매일같이 밥을 함께 먹고, 서로의 기숙사 방을 내 것 마냥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상이한 행로를 따라 거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워졌다. 부채꼴의 중심각의 크기가 일정하다 하더라도, 반지름이 길어지면 현의 길이 또한 증가하듯 말이다.

규범적 삶을 지양하며 계획을 수립하던 친구들조차 현실에 붙들려 주저 앉는 경우가 다수였다. 역설적이게도 삶의 행로는 다르지만 그 양태는 한 지점으로 수렴하는 듯싶다. 가끔 술잔을 기울이면 투자, 연봉, 진로 이야기가 안주가 되었고, 오늘의 쾌락보다는 내일의 안녕을 위해 일찌감치 술자리가 갈무리되었다.

탄도를 좇는 삶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경험에 대한 반동으로 세속에 가까워졌다 하더라도, 모난 데가 마모된 만큼 유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천태만상과도 같은 우리네 삶에 섣불리 조언을 건네는 일에 신중해진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애연하게도 ‘그럴 수 있어’라며 우연의 총합인 현시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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