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게 세상은 지금과는 달리 분명했다. 급식을 먹는 삶은 게임과 같아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시험에서 고득점을 노리면 훌륭한 아이가 될 수 있었다. 내향성의 극한에 있던 나는 점심시간에도, 방학에도 도서관에 상주하였기에 남보다 조금 빨리 머리가 컸다. 자연스레 선생님들은 “이걸 대체 어떻게 알고 있니?”라며 나를 영재 보듯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급식 변성운’은 다량의 헛바람이 차 있었다.

글은 인격의 지문 같아, 내면이나 행보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당시 나의 글은 “나 이런 것도 알고 있어”를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한, 서술형 고득점을 노리는 글이었다. 동시에 오만함과 공명심, 인정 욕구의 덩어리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나의 글을 돌아보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이런 기조는 두 차례에 걸쳐서 깨졌다. 첫째는, 어떤 작가님과의 수업이었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인문학 수업을 겸해서 매주 나를 한 작가님의 작업실에 내려주고 가셨고, 매주 책 한두 권에 대해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썼다. 그분은 “성운아. 중요한 건 네가 읽은 책이 얼마나 네 삶에 다가왔는지, 네 글이 얼마나 네 삶에 가까운지야.”라고 말씀하셨다. 한 번도 내 글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한 적 없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산에서 갑자기 안개가 개인 듯한 충격을 받았다.

둘째는 군대에서였다. 그곳에서 나는 순탄했던 학생의 삶에서는 멀게만 보인 치열한 삶 속 비탄과 애처로운 허풍을 접할 수 있었다. 상급자에게 인격모독에 가까운 멸시를 받으면서도 꾹 참는 중령님, 능력은 차고 넘치지만 연줄이 안되어 마지막 승진 기회에서 떨어진 소령님, 능력이 없어도 살아남기 위해 매일 상급자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는 일에만 열중하는 장교의 모습을 보면서 홀로 서는 사람에게는 삶이 전쟁과도 같음을 이해했다. 자신이 사회에서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었던 양 부풀려 자기를 떠받들게 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솔직함이 줄 수 있는 흡인력을 이해했다. 확실한 건 이전에 주장을 너무 쉽게, 단정하며 뱉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세상이 조금 더 불분명하고 감정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또 선생님이 나를 높게 평가했으면 해서 글을 썼다. 지금은 미숙함을 떨쳐내고야 깨달은 세상의 불분명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글을 쓴다. 어떠한 말을 하기 이전에 내가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또 내가 그 말을 진정으로 옳다고 여기는지, 또 그 말이 다른 모든 배경을 따졌을 때 적절한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글은 이 모든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해결하기 위한 소통 수단이 되었다. 서론, 본론, 결론의 흐름을 구상하며 엉킨 생각을 엮어낸다. 문장 간의 논리적 연결성을 따지며 사실과 주관을 구분한다. 글을 씀으로써 나는 꼬인 세태와 관념 속에서 입장을 정립하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

어느덧 카이스트신문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마지막 학기, 팔자에도 없는 부편집장의 위치까지 올라갔지만 카이스트신문에 정이 많이 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신문만큼 글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단체를 아직 보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작문을 사랑하고 글에 진심인 개인의 입장에서 카이스트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응원한다.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