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제일 친한 친구가 참여하는 카이스트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기 주말 저녁, 학교 대강당으로 향했다. 착석 후 머지않아 공연이 시작됐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웅장한 하모니에 조금 매료되기도 잠시, 곧이어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웅장한 소리는 잠시 머리를 지나가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잡념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다.

 잡념이 폭발하는 순간은 굉장히 소중한 때이다. 어떤 생각들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공연 동안에, 내 머릿속은 온통 미래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찼다. 코 앞에 닥쳐 있는 과제에 대한 고민과 다음 학기 진행될 인턴십에 합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내 실수로 큰 차질이 생긴 동아리 업무를 수습할 생각을 했다. 이번 주 연구실 사람들을 따라 참석한 학회에서 느낀 나의 무능함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아주 먼 미래에 만족할 만큼 먹고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전역 후 설레는 마음으로 복학했던 이번 가을학기 처음의 마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즐겁고 새로운 것을 배울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실패하더라도 도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어쩌다 남들과의 비교와 삶에 대한 걱정에 압도되어 삶의 한순간조차 제대로 집중할 수 없게 되었는지, 반복되는 실패에 내 존재 가치를 의심하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이유는 욕심이다. 주변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고 성적을 조금 낮게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런 나를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 너머는 보지 못할까?”. 그들이 지금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 조금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온 나의 모습을 왜 보지 못했을까. 차근차근 여러 단계를 지나온 누군가와 이제 본격적으로 발을 떼기 시작한 나를 비교하며 자책하는 모습,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와야만 한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굉장히 비이성적인 생각이다.

 어쩌면 남과 비교하며 자기를 비난해 온 모든 순간은 결국 삶을 잘 살아 내고자 하는 나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기왕 한 번 사는 인생, 잘 살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몸부림이 덫에 걸린 동물의 그것처럼 자신을 옥죄기 시작하면, 결국 차분히 한숨 돌리며 자신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폼 나게 사는 것은 옵션이다, 하지만 무사히 삶을 살아 내는 것은 필수이다.

 치열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당신이 잘 하고 있다면 그 느낌 그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잘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당신은 이미 잘 하고 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만, 최선을 다한 자신에게 숨을 고를 시간을 주자. 그 틈에 삶을 살아 내려는 우리는 스스로 덫에서 잘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공연장을 지인들과 저녁을 먹기 위해 먼저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는 길. 그냥, 갑자기 무거운 나의 짐들을 어딘가에 덜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무거워서 절대로 한 번에 나를 수 없는 나의 짐들을 차근차근 옮겨볼 작정이었다. 페달을 밟는 발걸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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