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얀색을 좋아한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색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섞여 있는 '혼탁한' 색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고?

빛의 세계에서는 여러 색깔의 빛을 섞으면 하얀색이 된다 (이를 백색광이라고 하는데, 물리학에서 백색광은 모든 파장의 가시광선이 섞여 있는 빛을 의미한다). 즉, 섞으면 섞을수록 하얗게 되는 것이다. 다 섞여 버리면 검게 변해버릴 것이란 건 우리의 고정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적어도 빛의 세계에서는. 가장 순수한 색이 모든 것의 섞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자연과 과학은 가끔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을 준다.

 

나는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는데, 아주 재미난 경험을 많이 했다. 그곳에는 “내 것”과 “네 것”의 경계가 명확했다. 심지어, 함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도 따로따로 계산서가 나왔다. 참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여기는 섞일 여지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함께 식당에 가면 '일단 같이 먹을 탕을 하나 시키고' 자기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한국의 문화는 일본인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그럼 저 탕 값은 누가 내는가? 일본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자, 한국의 사회에는 본질적인 모호함이 있는 듯했다.

 

일본의 사회는 육각형의 벽돌로 집을 지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빈공간없이 차곡차곡 마치 벌집처럼 튼튼한 구조로 만들어진 그런 집 말이다. 그 사회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모가 난 여러 모양의 벽돌을 잘 다듬어 모두 같은 모양의 육각형으로 만들어 사회에 내보내는 것 같았다. 모두가 함께 있어도,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명확하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에 비해 한국은 다양한 모양의 벽돌로 지어진 집과 같았다. 울퉁불퉁한 모양의 벽돌로도 잘 쌓아 올리면 튼튼한 집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비어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누구의 소유도 누구의 책임도 아닌, 혹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 그런 공간. 집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빈 곳을 잘 채워 메꾸어야 한다. 자, 비어있는 그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이제 경쟁이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저 비어있는 공간을 너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너의 능력을 보여라. 승리자는 그 빈 곳을 차지하며, 패배자는 네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당신의 아이가 빈공간도 차지하지 못하는 패배자가 되길 원하는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학원을 보내서 공부를 시켜야 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고 좋은 직장에 가야한다. 한국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저 빈공간을 너의 공간으로 만들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 경쟁을 통해.

 

벽돌은 모양이 다양한 만큼, 색깔도 다양하다. 빨간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고, 초록색도 있다. 누구나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빈 공간을 자기의 색깔로 채운다. 그렇게 자신의 색깔을 확장해 나간다. 결국 승리자의 색깔이 전체적인 집의 색을 결정하고, 이 집에서 누가 더 많은 색을 차지하느냐가 승리의 판단 기준이 된다.

 

승리자는 환호하고, 패배자는 경쟁은 고사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데 모든 것을 바칠 수밖에 없다. 꾸물거리다가는 자신의 색깔마저도 바뀌어 버릴 판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꼿꼿이 자신의 색깔이 칠해진 벽돌만 고집하고, '비어 있는 곳은 나의 것이 아니니 탐하지 않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남들 다 그렇게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너만 손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손해를 봤다'라고 생각하는 무서운 세상이다.

 

경쟁은 아주 선명하게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모두가 승리자의 환호를 꿈꾸지만, 대부분은 패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신(神)에게 나의 승리를 기도해 보지만, 나의 승리를 위해서 누군가를 패배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신(神)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 신(神)마저도 주저할 수밖에 없는 무한 경쟁의 사회. 그런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먼 옛날, 평생을 바쳐야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를 이제 우리는 컴퓨터 앞에서 단 몇 시간이면 알아낼 수 있다. 즉, 이제는 많이 알고 있는 것이 권위를 주는 시대는 지났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이게 바로 흔히 말하는 창의적 능력이다.

 

생각해보라. 빨간색의 나와 파란색의 네가 경쟁해서, 내가 이기면 빨간색이 확장하고 네가 이기면 파란색이 확장하는 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나? 명백하지 않은가? 경쟁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바야흐로 진정한 퓨전의 시대이다. 컴퓨터와 전화가 핸드폰 하나로 모이게 되고, 이제는 자동차를 기계라 불러야 할지 전자제품이라 불러야 할지, 헷갈리게 되는 그런 시대가 왔다. 영화와 과학이 합쳐지고, 소설과 드라마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섞음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눈앞에 당도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이 아닌, '섞을 수 있는, 혹은 섞일 수 있는', 즉,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섞어봐야 잡탕밖에 더 되겠냐?”며 핀잔을 던지는 어른들은 어쩌면 “섞여지면 혼탁해진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관념일 뿐이다. 더해졌을 때, 거기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이다. 모든 색깔의 빛이 합쳐졌을 때 이윽고 하얀 빛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저 비어 있는 공간을 내 색깔, 혹은 네 색깔이 아닌 새로운 색깔로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협력을 해서 새로운 색깔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떻게 하면 저 빈공간을 너의 것으로 만들 것이냐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너의 색깔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주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하는 일이다. 다양한 색깔이 더해졌을 때, 또 다른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비어있는 공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다고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빛과 같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함께할수록 세상은 점점 밝아질 것이다. 이윽고, 하얀 세상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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