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즐거웠고 즐겁다. 맥주 한 병에 기분 좋은 취기가 올랐다. 람빅의 복숭아 향이 지나치게 차갑지 않은 온도에서 콧등 아래 잔잔히 머무른다.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각의 어수선한 식당가에서 학교로 들어오는 40분짜리 산책. 친구들의 산발적인 러시아어와 버무려진 영어들. 대답들. 질문들. 좋아하는 것들. 불평. 다음날 수업. 잠이 들기도 전부터 잔잔하게 올라오는 숙취와 근육통. 삐걱대는 고관절과 저리기 시작한 전완. 아무것도 거슬리지 않아. 아무것도.

   대학교에 온 후 어떤 술자리도 즐길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피했다. 소금에 바싹 태운 고기 냄새와 맛도 향도 없이 오로지 알코올인 소주, 고성방가, 목소리가 소음에 파묻혀 입 모양을 읽기 위해 바라본 상대방, 술 게임, 기묘한 들뜸 사이에 몸의 한계를 넘어 쑤셔 박는 알코올 따위를 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차라리 취하면 나도 그 속에 스며들까 싶어 마셔보았지만 아무리 마셔도 정신은 기분이 더러울 정도로 명료하고 몸은 아프며 귀는 피로했다. 둔해지는 몸과 감각 사이로도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연거푸 하는 모습을 보자 아, 나도 그날 저렇게 보였을까, 내 기억이 닿지 않던 시간에 나는 저랬을까, 하는 의문이나 허탈함만은 선명하게 파고들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존재하기에 너무 피로했다. 존재에 완전히, 빠짐없이 지쳤다.

   술이 나를 지치게 했나? 글쎄. 나는 그렇게 나간 술자리에서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가며 입에 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마셔도 지나치게, 끔찍하게 제정신이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더라도 모든 순간에 제정신이었다. 말하자면 평소랑 다름이 없었다. 취해봤자 마주하는 건 그냥 방향감각이 사라지고 온몸이 쑤시며 모든 게 성가신 상태의 나일 뿐.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든 거스르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표준치를 어렵지 않게 수행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술자리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판단력을 손쉽게 내던졌다. 어떤 부정적인 감상도 들지 않는다. 마냥 신기했다. 다들 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여기며 살아가는군. 이 상태로 쉽게 일상으로 복귀하는군. 자기 통제를 쉽게 던지는 만큼이나 그 통제를 쉽게 유지할 수 있구나. 난 그게 너무 어려워. 너희가 취해야만 서로에게 공유하는 상태가 나한테 불시에 찾아올까 봐, 그 어떤 것도 마시지 않았는데 어느 날 나에게 선뜻 찾아올까 봐 매분 매초 신경을 곤두세우고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점검해. 너무 피로해. 너무 지쳤어. 자연스럽게, 다들 그러듯, 이 모든 걸 굳이 신경 쓰지 않고도 흘러가는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스스로를 흘러가게 두고 싶은데 바로 그것이 가장 어려워. 정말이지 빠짐없이 지쳤어.

   왜 이 친구들이 편할까?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영어는 가장 편한 선택지가 아니었지. 모두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때 모국애보다 애쓴 단어 선택을 거쳤을 게 당연한 자리다. 나는 그게 너무 편했어. 러시아어나 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사이에 섞인 영어들로써 너희들의 삶에 파고들고 질문하는 게, 나를 알리고 이해 받는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간만에 편안하게 술을 마셨어. 간만에 편안하게 대화를 했지. 간만에 편안하게 존재했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나는 영어가 절대 편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렇겠지만, 이 존재는 너무 자연스러워. 이 존재 방식은 어떤 작위도 요구하지 않아. 그 어떤 애씀이나 움직임도. 흘러가게 둘 수 있다. 그저 흘러가며, 간만의 부동.

  이쯤되니 궁금해진다. 내가 모국어에서 무언가 중요한 걸 겪지 못했던 건 아닐까? 내가 그저 힘든 시기라고 언급하고 넘어가기에 청소년기 끝물의 고립과 무색무취한 하얀 방에서 겪은 박탈의 시기가 남들은 으레 타협하고 넘어갈 만한 계기를 내 존재로부터 차단했던 건 아닐까? 그러면 한국에서 성인이 되었다면? 한국에서 또래와 함께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맞이하며 자랐다면 이런 부적절감은, 지침은 그냥 없는 단어인 채로 살 수 있었을까? 글쎄. 이미 내 삶과는 너무나 먼 얘기라 짐작도 할 수가 없어. 모국에 돌아와 한국어를 일상에서 하는 지금 나는 대체 어느 구석에서 이방인인 걸까? 대체 무엇이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알 수가 없고 지쳤지만 오늘은 잊을 수 있었다. 내일은 다시 마주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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