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중학생 때까지는 종이 신문을 읽었던 것 같은데, 인터넷이 되지 않던 학생용 핸드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꾸면서 신문지를 만질 일이 없어졌다. 내 지문은 아직 갱지의 촉감을 기억하고 있는데 사실 어느 순간부터 종이보다는 액정 필름의 촉감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 신문을 읽는 것이 마치 식사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진 기사들을 차례대로 읽는 것이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나 보다. 이 식사에는 에피타이저가 없다. 식욕을 돋우는 작은 빵이 나오는 코스요리와는 달리 종이 신문의 맨 앞장에는 늘 가장 중요한 기사가 인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목부터 차례대로 훑어 내려오다 취향에 맞는 기사를 먼저 읽었다. 부족한 상식을 채우고자 마음에 들지 않는 제목이더라도 중요해 보이면 눈길 정도는 줬다. 꿉꿉하고 먼지 냄새가 나는 종이를 차례대로 넘기며 광고와 주식 코너를 걸러 읽다 보면 어느새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해 있다. 오피니언란이 나에게는 디저트였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와 같은 사회를 겪고 있는 누군가의 의지가 느껴지는 날 것의 이야기가. 오피니언란을 읽을 때면 부스럭거리는 소음에 글쓴이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했다. 평생을 살아도 만날 일 없는 타인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했다.

우연히 카이스트 신문의 독자칼럼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전에 읽었던 오피니언란을 떠올렸지만, 읽다 보니 그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은 덜 날카로웠고, 나와 같은 연령대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일상적인 영역을 다루는 글이 많음에도 그것이 일기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에 타인의 파편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친분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어쩌면 만날 수도 있는 사람. 나는 180km 떨어진 곳에서 당신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이 거리가 얼마나 머냐면, 비구름이 울산에서 대전까지 가는 데 반나절이 조금 넘게 걸린다. 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은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조금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내 머릿속에만 고여있던 문장을 바깥에 흘려보내는 것인데 두렵지 않을 리가 없다. 바깥에 드러난 생각은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고, 평가받고, 또 읽는 이에게 영향을 끼칠 테니까. 나는 그 불확실성이 달갑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에 투고된 글들이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체 없는 생각을 언어로 정리하고, 잘라내고 다듬어서 내보인 것인데, 그 무게가 가벼울 리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건 제법 즐거운 일이다. 다른 이의 생각을 주기적으로 섭취해 주지 않으면 머릿속은 내 생각으로만 가득 차 버린다. 내가 겪은 일, 내가 만든 기준, 내가 느낀 감정과 내가 내렸던 가치 판단. 사람이 계속 그렇게 살다 보면 편협한 시각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칼럼을 읽으면서 작은 박람회를 도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례대로 페이지를 넘기며 조회수를 하나씩 올렸다. 어떤 글에는 길게 머물렀고, 어떤 글은 가볍게 읽었다. 읽고 난 뒤의 울림은 하나하나가 똑같이 소중했다. 한 명의 독자로서 당신들의 이야기가 퍽 소중했다.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