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은 팔 길이만큼의 거리를 둔다는 말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공공 지원정책의 원칙을 의미한다. 1945년 영국에서 예술 평의회를 설립하며 정치와 예술의 적절한 거리를 강조하기 위해 고안한 ‘팔 길이 원칙’은 현재 전 세계 문화예술 분야 공공 정책의 기조로 널리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현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은 지원은 줄이면서 간섭은 하는 식의 퇴행을 보여주고 있어 유감이다.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안에서 한 해 약 60억 원 규모로 운용해 오던 국민독서문화 증진지원 사업이 통째로 사라졌다. 예산안은 국가 발전에 대한 큰 비전 속에서 한 해의 재정 운용과 나라 살림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중대한 계획으로, 관련 분야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토대로 신중하고 일관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삭감되며 과학계의 반발을 산 데 이어, 국가연구개발 예산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소규모 예산으로 어렵게 버티고 있는 출판계마저 이권 카르텔로 지목되며 관련 예산이 갑작스럽게 삭감되었다. 특히 삭감된 예산의 상당 부분이 지역 기반의 책 읽기 수요 창출을 위해 마련되었던 지방 도시 서점 활성화 예산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문체부 측은 지역 서점에 대한 지원이 결코 삭감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디지털 도서 물류 지원, 지역 서점 통합전산망 지원 등 유통 인프라 개선을 위한 예산은 오히려 증액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지역 서점의 기능은 단순히 책을 유통하는 소매업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활동을 촉진하는 지역사회의 거점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번 예산 삭감으로 인해 그동안 서점을 통해 제공되던 여러 문화 행사를 더는 지역민이 누릴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지방의 문화 빈곤과 지역 간 문화 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전망이다.

출판과 서점 분야의 예산 지원이 삭감되는 와중에 독서 활동에 대한 부적절한 간섭과 개입이 커지고 있다. 지난 8월, 충남도지사는 도내 공공도서관에서 어린이 성평등과 성교육을 다룬 몇몇 도서에 대한 열람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일부 보수, 학부모 단체가 성행위가 묘사된 어린이 성교육책 및 동성애와 낙태 옹호 등을 다룬 인권, 페미니즘 관련 책을 공공도서관 서가에서 없애 달라고 제기한 민원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졌다. 실제로 이 발표 이후 충남도 공공도서관에서는 어린이 성평등과 성교육 관련 일부 책들의 열람이 제한되었고, 일부 도서는 검색까지 규제되는 등 명백한 도서 검열이 자행되고 있다. 공권력의 도서 검열은 창작자와 출판계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축시키고, 문화 다양성을 훼손시키며, 이는 궁극적으로 문화예술 전체의 획일화와 황폐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지원은 없고 간섭만 있는 문화예술 지원정책이 계속된다면, 한국이 자랑하는 K-콘텐츠 산업의 미래도 기약할 수 없다. 자유로운 독서문화라는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한류까지 들먹여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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