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떨림, 두려움, 안도감, 절망, 희열. 모두에게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개강의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바라본다. 남은 시간은 나흘. 젠장, 분명히 종강 날에는 이번 방학에는 일러스트레이터도 배워 보고 토플 공부도 더 하고 계절학기 수업도 들으리라 다짐했는데, 역시나 뜻대로 되는 건 없다. 지난 2주 동안은 친구들과 종종 놀러 다닌 걸 빼면 하루 종일 일만 계속 하다 잔 기억밖에 없다.  방학 시작하고 룸메이트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던 게 겨우 며칠 전 일 같은데.

 

제주도?

 

슬며시 제주항공 앱을 켜 청주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왕복 항공권을 검색해본다. 물론 실제로 가지는 못할 것이란 사실 따위는 잘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딘가에 가고 싶을 때마다 항공권을 검색해 보는 건 내 이상한 습관 중 하나이다. 늘 그렇듯 최저가 특가 광고가 화면을 가린다. 청주-제주 특가, 수수료 포함 왕복 21.900원! 보나 마나, 저런 건 보통 실제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날 밤 비행기로 도착해서,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올라오는 떨이 따위로나 가득하다. 속는 셈 치고 클릭. 예상했던 대로 출발 날짜는 내일이다. 그것도 내일 밤 비행기로 제주에 도착해서, 그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귀환.

 

...내일?

 

나는 내일 일정이 없다. 다시 달력을 꺼내 사흘 남은 죽어가는 방학의 마지막 몸부림을 바라본다.

 

......

 

청주공항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두 번의 환승을 거치며 문득 드는 생각, 공항까지 가는 게 공항에서 제주도 가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구나. 꼭 더 중요한 걸 미뤄두고 사소한 거에 목을 맸던 내 방학 같네, 하는 생각에 피식 쓴웃음을 짓는다. 덜컹덜컹. 어느새 공항에 도착한 버스.

 

버스는 전국 팔도에서 항상 나의 소중한 발이다. 택시를 타기에는 돈이 없고 렌터카를 빌리기에는 나이가 안 찼으니 결국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고른 건 또 다시 버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달리니 어느새 중문야시장. 제주도에 올 때마다 들렀는데, 역시 이번에도 예외는 없다. 시간이 늦어 그런지 하는 가게가 많지 않다. 빠르게 시장을 둘러보고 음식 만 원 어치를 챙겨 나와 바닷가 계단에 앉는다. 전철 타고 오 분이면 바다를 실컷 볼 수 있는 인천 사람인 나는 사실 바다를 보아도 별로 설레거나 낭만 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저 편안함과 익숙함만이 느껴질 뿐. 천천히 파도가 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미묘한 행복을 느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짜릿한 감각도 좋지만, 나를 편안하게 해 주고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주는 바다가, 무엇이든 모두 품어줄 수 있는 바다 같은 사람이 나는 좋아.

 

혼자 여행을 가 보는 건 사실 내 오랜 로망 중 하나였다. 사람을 항상 갈망하고 또 사람에 목마른 나였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혼자만의 시간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던 터였다. 오늘은 혼자다. 곁에 함께 잠에 들 사람도, 함께 밥을 먹을 사람도, 함께 술을 마실 사람도 없다. 오히려 좋아, 하고 생각한다. 내 세계에서 동떨어진 이런 곳이 아니라면, 언제 또 이런 기회를 가져 보겠어.

 

어느새 나는 인파가 북적이는 한 바 구석에 앉아 창밖의 광기를 바라본다. 저 멀리 예쁜 누나들과 잘생긴 형들이 신나게 춤추며 정신없는 음악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있다. 바텐더 분 역시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반대편 테이블에서 이야기꽃을 피우시는 게 보인다. 다시 내 앞에 놓인 카타르시스 한 잔을 바라본다. 50도가 넘어가는, 이 가게에서 제일 센 칵테일. 약간의 호기심과 공포를 안은 채 한 모금 천천히 들이킨다. 캑캑, 바로 나오는 기침. 아직 어른이 되기는 아무래도 멀었다. 조용히 바텐더에게 카드를 건네고 나와 언제 올 지 모르는 심야 버스를 기다린다. 편의점에 들러 소머스비 한 캔과 포카칩 한 봉지를 사 방 안으로 점프한다. 그래, 나는 부드럽고 달콤쌉싸름한 이 감각이 *아직은* 불타는 알코올의 작열통보다 더 좋아. 이윽고 일본에 다녀 온 친구가 선물해 준 입욕제를 물에 풀고 용솟음치는 거품을 바라본다. 보글거리는 거품이 일주일 동안 쌓였던 부글거리는 감정들을 녹여 분해해간다. 휴대폰을 열어 내일 비행기 시간을 확인한다. 아침 8시 50분. 나는 주말이면 한 시에도 안 일어나는 사람인데, 돈이 굳었으니 몸은 좀 고생해야지. 씁쓸한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7시부터 7시 8분까지 1분 간격으로 알람을 세팅하고 눈을 천천히 감는다. 잠이 든다. 또다시 새로운 하루, 그리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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