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학생 시절 JMS 추적 시작한 김 교수, 추적의 배경부터 현 상황까지 관련 일화 밝혀

지난 3월 3일, <나는 신이다>라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다. <나는 신이다>는 사이비 종교의 이면을 고발하는 8부작의 다큐멘터리이다. 이 중 대중들에게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낸 회차는 기독교복음선교회(이하 JMS)를 다룬 1~3회였다. 3회에 걸친 내용에는 JMS를 추적하고 공론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나온다. 바로 우리 학교 수리과학과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모두 마친 김도형 단국대학교 수학과 교수이다. 그는 우리 학교 학부 재학 시절 JMS의 범죄 행각 추적에 뛰어들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행태를 폭로하고 피해자 보호에 힘썼다. 

본지는 KAIST 학생이었던 김 교수가 JMS 추적에 뛰어든 이야기부터 KAIST를 둘러싼 JMS 관련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자 김 교수와 지난 4월 24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도형 교수의 기사가 담긴 183호 카이스트신문(당시 과기원신문).                                 ⓒ 이희찬 기자
김도형 교수의 기사가 담긴 183호 카이스트신문(당시 과기원신문).                                 ⓒ 이희찬 기자

 

KAIST 학생이 JMS를 추적한 이유

김 교수는 본인과 JMS의 첫만남이 대학교 졸업 직전인 1995년에 시작되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원래 서울에서 다니던 교회가 있었다. 서울 집에 가지 않을 때, 교회를 갈 수 없었다. 이에 대학원 진학을 앞둔 시점, 대전에서 다닐 교회를 정했어야 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정보가 비교적 부족하여 교회의 평판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룸메이트가 교회를 소개했다. 그 교회가 바로 JMS의 대전 지부였다. 김 교수는 “룸메이트가 나쁜 학생도 아니었기에, 당시에는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인 줄 알았다”며 “처음에는 일반 교회로 생각하고 다녔다”고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교회를 다니며 당시 교리가 일반적인 교회와 달리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정씨를 신격화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내용을 조사하고 이를 관계자들에게 되묻기 시작했다.

그는 “대전 소재 모대학 영문과 출신 여성이 KAIST를 포함해 근처 신도들을 다 관리했다”며 JMS의 KAIST 조직 관리 체계를 회상했다.  그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에 대한 대응 역시 조직 관리 체계를 따라 이어졌다. 김 교수는 “KAIST를 담당하는 간사가 본인 선에서 감당이 안 될 듯하니 대전 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전도사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대전 지역 총괄 전도사가 김 교수를 관리하는 형태로, 내부의 대응이 시작된 것이다. 김 교수는 “그 여자(대전 지역 총괄 전도사)와 여러 논쟁을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더 다양한 정보를 조사했다”며 “이 과정에서 <현대종교>라는 잡지에 실린 전 JMS 신도 여대생의 성추행 폭로 수기 등 여러 피해 사례를 접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대전 지역 총괄 전도사와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정씨의 설교를 직접 듣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씨의 설교는 외려 김 교수에 확신을 주었고 그는 3개월만에 JMS를 완전 탈퇴했다. 이 과정 중 대전 지역 총괄 전도사와 김 교수가 교제를 시작했고, 꾸준한 설득에 그녀 역시 JMS를 탈퇴했다. 김 교수는 “탈퇴 이후 그녀(전도사) 또한 JMS에 의한 성추행 피해자임을, 그런 피해자가 무수히 많음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이를 계기로 “외려 JMS를 무너뜨리고자 다짐했다”고 설명했다. “가족, 친구들 모두가 JMS 추적을 말렸다”고 김 교수는 회상했다. 그와 연인 관계가 되었던 전도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 교수는 “당시 여자친구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불가능한 일에 집중하지 말고 생활에 충실하자’고 이야기했다”며 당시를 묘사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의견 차이로 다투다 1998년 헤어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은 맞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계란이 바위는 못 깰 지언정, 돌아다니다 보면 중장비를 쓸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JMS 추적, 위협, 그리고 도움

그런 다짐에도 김 교수는 “실제로 매우 위험하고 어려웠다”고 상황을 회고했다. 1990년대 당시에는 형법 제296조와 제306조를 통해 친고죄 근거 조항, 즉 범죄 피해자의 소 제기가 있어야 수사기관의 개입이 가능하다는 조항이 존재했다. 김 교수가 조사에 뛰어든 당시는 2012년 12월 18일 형법 개정을 통하여 성범죄에 관한 친고죄가 사라지기 전이었기에 수사를 위해서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직접적인 고소가 필요했다. 김 교수는 “피해자들이 소극적이었다”고 토로했다. JMS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과거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시선에 따른 수치 등에 외려 피해자가 김 교수에게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조사의 어려움 외에도 김 교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김 교수는 정씨의 경호원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당시 KAIST 재학생이던 JMS 신도가 본인의 자동차 번호를 교주(정씨)의 경호원한테 알려줬다”며 사건의 발단을 밝혔다. 그는 “그(경호원)와 몇 번 만나다 (1998년 2월)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1999년 1월 6일, 황 양 납치 미수 사건이 터진다. JMS의 전 신도인 황 양을 JMS 신도들이 납치하려다 경찰에 의해 중도에 실패한 이 사건은 지상파 3사를 비롯한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김 교수는 “1월 7일 아침부터 뉴스화 되었다. 당시에 SBS하고 접촉이 있어 관련 사항을 제보했고, 다음날인 8일 SBS에서 심층보도를 했다”며 관련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MBC 역시 심층보도를 하는 등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교주(정씨)의 성범죄에 관한 보도와 취재가 계속되자 JMS 간부들이 대책회의를 시작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김 교수는 “대책회의에 참석한 현직 검사(당시 기준)가 본인에게 직접 전화했다”고 밝혔다. 검사와의 통화에서 김 교수는 협박을 당했다. 김 교수는 “다른 협박도 계속 이어지며 결국 도피 생활을 했다”고 회상했다. 이때, 김 교수는 자신의 도피 생활에 관해 교내 통신망 BBS에 올리며 교내에 공론화를 시작했다. 이에 대학원총학생회(이하 원총)는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관련 사실을 조사하는 한편, 김도형 학우 돕기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결성해 김 교수를 돕기도 했다.

김 교수의 대학원 생활이 이어지며 자연스레 우리 학교에서도 JMS 관련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0년, 김 교수가 구속되며 발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JMS 피해 여성을 도와 피해보상금을 받겠다던 박 모씨가 이를 횡령하자 김 교수가 반환을 요청하며 6월 14일, 다툼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김 교수가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었고 16일 구속되기에 이른다. (관련기사, 본지 183호, <김도형 학우 구속위기 넘겨>) 이에 우리 학교 원총은 당시 수학과 박사과정 학생이던 김 교수를 돕기 위해 재차 비대위를 설립하는 등 김 교수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비대위는 같은 달 27일까지 우리 학교 재학생 699명의 서명을 받는 한편, 별도의 탄원서를 접수 받아 김 학우를 재판할 판사 및 검사에게 200여통 가량의 탄원서를 송부하기도 했다. 특히 곽도영 수리과학과 학과장의 탄원서에 수리과학과, 물리학과, 생명과학과, 화학과 등 여러 학과의 교수 63명과 학생지원팀 직원 3명이 연대서명한 바가 있다. 김 교수는 “굉장히 짧은 기간, 심지어 방학임에도 교수님들께서 매우 많이 서명해주셨다”며 “당시 수학과 교수님들이 여러 곳에 연락하여 짧은 시간에 서명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같은 달 30일 열린 구속적부심에서 불구속 수사가 결정되며 풀려날 수 있었다.

JMS와 우리 학교가 직접 충돌한 역사도 있었다. 김 교수는 “2003년 KAIST에서 JMS가 몰려와 시위한 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2003년 11월 28일, 우리 학교 정문 앞에서는 정의실천시민연대 산하 병역 비리 추방시민연합(이하 시민연합)이 주도하는 시위가 열린 바가 있다. 해당 시위는 우리 학교의 전문연구요원 관리 행태가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며 후속 조치를 요구하는 시위였다. 그러나 김 교수가 1999년 7월 다른 JMS 피해자와 함께 설립한 엑소더스에서는 “시민연합이 JMS에 의해 조직된 시민단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전문연구요원인데, 연구는 안 하고 경찰서, 검찰청, 법원에 다니니 해당 단체는 병역 비리라 주장하며 학교에 내용 증명을 요구했다”고 회고했다. 즉, 병역 실태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닌 자신에 대한 압박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민연합 및 일부 언론은 김 교수의 사례를 들며 KAIST 병역 실태를 비판한 바 있다. 이어 김 교수는 “학교가 응하지 않으니 학교를 형사고발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KAIST는 자신들의 요원을 보내 전문연구요원 관리를 감시하겠다는 시민연합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시민연합의 시위 및 고발 등이 진행된 바 있다. 크리스천투데이에 따르면 우리 학교 원총은 성명서를 통해 JMS의 행태를 비판하는 한편, 김 교수 및 KAIST 전문연구요원 제도에 대한 부적절한 비판에 분노한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하며 “계속해서 JMS가 괴롭히는 상황이었기에 교내에서도 JMS는 매우 큰 이슈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한편, “일부 JMS 신도를 제외하고는 감사하게도 KAIST 내에서 김도형을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설명을 추가하기도 했다.
 

JMS의 체포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999년 황 양 납치 미수 사건의 보도 이후, 정씨는 오랜 해외생활을 이어갔다. 김 교수는 “수사기관이 큰 수사 의지가 없었다”고 이를 회상했다. 김 교수는 “인터폴 적색 수배가 되어 있음에도 의지가 없으니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며 정씨가 8여년간 해외생활을 하며 도피할 수 있던 배경으로 “수사기관의 수사 의지 부족”을 꼽기도 했다. 김 교수와 엑소더스 회원들은 해외에서 생활하는 정씨를 직접 추적했다. 김 교수는 다른 민간단체와의 협업에서 외려 도움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대만에서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대만 종교청류협회의 도움을 받아 대만 국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엑소더스는 2003년 7월 9일, 홍콩에서 정씨가 체포될 때,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에 따른 보복으로 다시 JMS의 노골적인 위협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당시 정씨는 불법체류의 혐의로 홍콩 경찰에 체포된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보석금으로 풀려난 뒤, 중국으로 밀항했다. 김 교수는 “정명석이 밀항을 한 뒤, ‘흑암의 세력과 맞서 싸워라’는 식의 설교를 함에 따라 광신도들이 본인과 엑소더스 회원을 추적했다”고 이야기했다. 김 교수의 부친은 같은 해 10월 29일, 7명의 JMS 신도에 의해서 쇠파이프, 야구방망이 등을 이용한 무차별 테러를 당했다. 김 교수는 “협박 전화나 미행은 수시로 있었다”고 말하는 한편, “본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으니 아버지를 테러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정씨는 2007년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2008년 한국으로 송환, 2009년 징역 10년형을 선고받는다. 10년의 복역 이후, 정씨는 2022년 출소 이후의 성범죄에 관한 혐의에 따라 법정 구속된 뒤, 현재 법정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김 교수는 현재의 법정 상황에 관해 “정씨 측에서 계속 무죄를 주장하는 한편, 재판을 지연시키려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현재 추가 피해자들의 고소가 이어지고 있으니, 이러한 사건들을 다 병합시켜 한꺼번에 재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 설명하며 “징역 10년, 10년, 10년씩 따로 받을 사건을 묶을 경우, 형량이 30년이 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노린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이광형 총장의 JMS 만남에 관하여

본지는 김 교수에게 우리 학교 이 총장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 김 교수는 지난 3월 23일, CPBC와의 인터뷰 중 “유명 대학 총장이 JMS를 만났다”는 발언을 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김 교수는 “지난달(3월) JMS 탈퇴 신도로부터 정보를 받았다”며 관련 정보의 입수 경로를 소개했다. <행복한 사람들>은 사회 저명인사, 정치인 등과 접촉하며 선교를 하는 등 JMS 세력 확대를 위한 단체이다. 김 교수는 “이 총장이 부총장이던 시절 <행복한 사람들>과 최소 2차례 이상 만났다”고 설명했다. 이 총장은 정씨가 출소한 2018년 이후인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우리 학교 교학부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김 교수는 “서로 다른 옷을 입은 사진 증거를 토대로, 최소 2차례 이상 JMS 모임에 이광형 총장이 참석한 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본지에 제보한 사진을 토대로 “총장이 등장한 사진에서 대검찰청 동상을 작업한 교수 등 JMS 신도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아가 “모임 이후 이 총장이 금산군 월명동으로 이동하여 정씨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JMS는 사회적으로 이미 굉장한 이슈였을뿐더러, 1999년에서 2003년 사이 KAIST 내에서는 정말 큰 논란이었다”며 “이 총장이 이를 모르고 만났을 것 같지는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KAIST 졸업생으로서 모교를 사랑하는 마음에,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화가 나 인터뷰에서 돌발적으로 이야기했다”며 인터뷰 당시 해당 발언을 한 이유를 덧붙이기도 했다. 또한 김 교수는 기타 다른 교내 인물의 JMS 접촉 여부를 묻자 “그 이외는 제보 받은 바 없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본지는 김 교수가 제기한 의혹과 관해 지난달 30일 이 총장을 인터뷰했다. 해당 내용은 아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JMS를 피하려면?

본지는 아직 JMS 등 사이비 종교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교내 구성원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역시 물었다. 김 교수는 “KAIST에도 JMS가 굉장히 많았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몇몇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KAIST 졸업 이후 타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동문이 피해자를 협박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등 KAIST는 물론, 경찰, 검찰, 국정원, 대학 등 사회 곳곳에 JMS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사이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에는 JMS나 정명석이 우스꽝스럽거나 왜 믿는지 이해가 안 갈 수 있다”며 대중의 인식을 언급하는 한편, “그러나 만약 본인의 지도교수가 JMS라면, 가족이 JMS라면, 영향을 안 받을 수 있을까” 되묻기도 했다. 더불어 “졸업한지 오래 되어 현재 KAIST 내부의 JMS 조직까지는 알지 못하나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사견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대전 지역이 본거지인 금산하고 가까워  KAIST도 여러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교내 구성원의 경각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광형 총장이 답하는 JMS와의 만남
 

김도형 교수가 제기한 의혹은 이 총장이 JMS 관련 모임에 두 차례 이상 참석한 뒤, 정명석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이 총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는 학술 활동의 일환이었다 설명했다. 다음은 이 총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진행한 일문일답이다. 
 

JMS 모임에 참석하거나 정씨를 만난 계기가 무엇인지?

과학자로서 ‘영적 현상으로 여겼던 것을 측정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오래 품었다. 엉뚱한 질문 같지만 과학은 초자연의 영역에 있던 미지의 세계를 이해해 온 역사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측정이었다.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인류는 미생물의 존재를 몰랐다. 그러나 이를 발견하고 정확히 측정함으로써 인류는 미생물을 이용할 수도, 이를 퇴치해 병을 막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영혼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초자연의 영역으로 남아있지만, 방법에 따라서는 충분히 과학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년 전 내 강연의 청중 중 한 명이 초청한 독서클럽 강연에서 이러한 궁금증을 지나가듯 언급한 바 있다. 그러자 독서클럽 회원들이 금산군의 한 목사를 소개했다. 학자가 아닌 종교인이 이를 측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그를 만났다.
 

해당 목사가 정명석인지 사전에 알고는 있었나?

본인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언제쯤 정씨인지를 인지했는지?

금산에 갔다 온 뒤,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옛날에 우리 학교 학생이 종교에 빠지는 등 소동이 났던 적이 있다. 이후 관련 정보를 찾아봤고 그때 정씨임을 인지했다.
 

정씨와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영혼을 측정할 수 있냐 물었다. 측정하기 어렵다고 답을 받았다.
 

정씨와의 만남 이후에도 JMS 측에서 몇차례 추가 연락은 없었는가?

이후에 전화가 왔지만 본인은 연구 목적으로 방문했던 것이고, 연구가 안 된다고 이미 답을 들었기에 답변하지 않았다.
 

정씨를 만나기 전, 사전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

연구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방문했을 뿐이다. 본인이 KAIST에 35년을 근무하면서 종교적으로, 다른 면으로 흠이 있었나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팩트가 없으면 의심이 갈 수 있으나 그 전에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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