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 “싫어”에 담긴 부정적인 감정도 부담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이 무색하게,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 훨씬 심하고 공격적인 감정이 담긴 ‘혐오'가 불쑥 다가온 것을 느낀다. 혐오와 차별은 일부 소 수자가 겪는 문제가 아니게 됐다. 성소수자, 저소득층, 노인층 뿐 아니라 내국인-외국인, 남성-여성, 성인-아이, 정규직-비정규직 등 사회를 편 가르는 기준이 되어버린 혐오가 우리 모두를 겨냥하 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혐오'는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혐오와 차별을 넘어 공존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 본다.
 

ⓒ 이윤지 기자
ⓒ 이윤지 기자

 

평범한 혐오의 시대, 혐오라는 역사 

혐오는 꽤 긴 역사를 가진 현상이다. 인간은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과 견해를 표현하면서 살아간다. 개인의 감정과 의견은 자신을 드러내는 요소로써, 타인에 의해 재단되거나 조작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타인과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생각은 순수하고 독립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굳어가는 관념과 체제가 개인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어떠한 생각을 폐기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혐오'라는 것이 어떻게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공격을 일으키고, 누군가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더욱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녀사냥이란 과거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마녀술’을 부린다는 혐의로 고소당하고, 재판받고, 처형된 사건들을 통칭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질, 이웃집 사람이 밤에 고양이로 변신해 돌아다닌다거나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당시 사람들은 믿었다. 가족 중 누군가 아프거나, 원인을 모를 일들이 일어나면 마녀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해 무고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 재판에 회부하고 온갖 고문으로 자백을 받은 뒤 처형한 것이다. 그렇게 유럽 국가들에서는 매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유 없는 혐오로 인해 화형 당하거나 참수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인 혐오와 집단 학살은 국제 인권 조약과 독일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혐오표현’을 규제하고 처벌하는 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경제적 대공황으로 독일 사회가 불안정한 가운데,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담은 여러 매체가 만연했던 사례가 있다. 유대인들은 열등하고, 그들이 독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수많은 책, 영화, 잡지, 기사를 포함해 생물학, 심리학 등의 연구자료가 독일 사회에 확산되었던 것이다. 독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는 집단적 이해가 자리 잡았고, 이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한 결과가 나치의 집단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치의 수용소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성소수자, 장애인, 흑인 등도 수감되어 있었다. 건강한 민족이자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존재들을 혐오하고 차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배격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곁에, 혐오 바이러스 

그렇게 진화한 혐오는 현대 사회 우리의 삶에까지 자리 잡았다. 한국 사회에서 혐오는 1997년 IMF 사태 이후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불안정이 극대화되어 가는 가운데, 소수자들과 약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0년 중반부터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수면위로 올라왔으며, 2000년 초 장애인들은 스스로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하며 사회에 변화를 요구하는 강력한 목소리를 내었다. 2000년 전후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주민이 많아지며 사회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한편, 2018년 예멘 난민 문제와 이슬람 혐오 문제를 통해 우리 사회의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불이 붙은 여성운동은 2005년 호주제를 폐지시키기도 했지만,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성별 갈등은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온라인상에서 수많은 불쾌한 표현들을 양산해 내는 등 폭력적으로 왜곡된 듯하다.

우리 사회 혐오의 심각성에 대해 질문할 때에는 혐오가 사회와 시민들의 의식으로 얼마나 확산되었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위)에 따르면 인터넷 상의 잔혹-혐오 게시물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관련한 게시물은 2018년 380여건에서 2021년 팬데믹과 함께 2,400여건으로 6배가 넘게 증가했고, 관련한 민원이 급격하게 증가해 방통위의 심의 건수도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 포털 뉴스의 댓글창은 대부분의 혐오 표현을 경험하는 장소이다. 국국가인권위원회가 2021년 조사한 ‘온라인 혐오 표현 인식조사'에 따르면 ‘뉴스·댓글에서 혐오 표현을 경험했다’라고 답변한 응답자가 71%에 달했다. 특정 지역,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특정 종교, 정치 성향 등을 주제로 증오감과 불쾌감을 드러내는 일이 익명성이라는 가면 아래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혐오를 조장하는 발언들을 경험하다보면 이것이 사회 구성원 다수의 의견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또한 홍주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혐오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여과 장치가 부족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비방글을 계속 접하면 혐오에 동조하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지는 ‘에코체임버 효과(Echo Chamber Effect)’가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부정적인 정서, 감정들이 만성적으로 활성화되다보면 공격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혐오는 세계적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적 건강 상태가 불안정해지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시민들의 불안, 공포, 분노 등의 정서가 크게 증폭되고 부정적 감정에 대한 정신적인 임계치가 낮아져 혐오 담론이 심해진 경향이 있다. 우려되는 점은 공동체 속에서 타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면 이는 공동체의 위기로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욕먹어도 남는 장사, 혐오비즈니스

선거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앞두고 우리는 혐오 발언을 통해 정치적 세력을 밀집시키는 하는 정치공학적 전략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경쟁 후보를 지지할 것 같은 계층 또는 소수자를 향한 혐오 조장 발언을 통해 특정 집단을 공격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지역·이념 갈등과 세력 간의 대립은 계속해서 있어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특정 계층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혐오 정치가 이토록 만연한 적은 없었다. 공적인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의 혐오 발언은 대중들에게 그런 표현을 해도 괜찮다는 권위를 쥐여주는 효과를 불러일으켜 우리 사회의 혐오 표현에 힘을 싣는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혐오 정치의 현실을 진단하며 “과거 정치적 대립이 죽지 않으려 싸우는 공포 심리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더러워서 피하고 절멸시키겠다는 혐오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며 “다른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위협한다”고 이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남의 불행이나 사고, 실수, 결점, 잘못 등을 인터넷상에 주로 영상의 형태로 공론화해서 이득(조회수, 인지도, 광고 수익)을 챙기는 사람을 언제부터인가 ‘사이버 렉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차 사고가 나면 달려오는 견인차(렉카)처럼 화젯거리가 생기기만 하면 달려드는 일부 콘텐츠 제작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공인 뿐 아니라 매체에서 언급된 일반인 또한 그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그들은 기본적인 사실 검증을 뒤로 한 채 자극적인 제목과 시선을 사로잡는 미리보기 이미지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대상에 대한 극단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방송인이 허위 사실과 테러 수준의 악플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할 때 사이버 렉카에 책임을 묻는 여론이 들끓기도 한다.

이렇듯 온라인 매체가 하루가 다르게 비대해지고 정보의 조작이 쉬워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는 정보가 사실인지 판단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매체여야 할 언론 또한 혐오를 확대 및 재생산하는 공범이 되기도 한다. 화제가 될 만한 이슈를 빠르게 보도하려고만 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가 비판받는 이유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해프닝으로 끝날 이슈조차 언론이 보도하면 독자가 내용을 신뢰할 가능성이 커지고 기사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논란이 확대된다. 언론은 이슈가 될 만한 사건들을 보도해 독자들의 ‘클릭 수’를 끌어내려 한다. 이 때문에 대중은 언론에 대한 신뢰를 잃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한 인권위의 혐오 표현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0% 가까이가 ‘언론이 혐오를 부추긴다’고 답변한 바 있다. 이렇듯 혐오는 거미줄처럼 얽힌 이해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생산되고, 이를 통해 누군가는 이득을 본다. 이른바 ‘혐오 비즈니스’가 그 실타래를 풀어내기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봤던 우리 사회의 혐오를 걷어내기 위해서 혐오 표현에 대한 사회적 규율과 통제, 그리고 시민사회의 대응이 요청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정확한 정보 유통의 중요성은 혐오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혐오에 대한 최선의 대안은 교육과 의식 확산을 통해 혐오 대상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언론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들의 자정 노력과, 혐오에 대한 대응을 위한 규제와 기준을 마련하려는 국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개인은 자율적으로 혐오 표현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편견과 차별을 떨쳐냄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 이윤지 기자
ⓒ 이윤지 기자

 

참고문헌 |
「헤이트: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홍성수 외 6명, 마로니에북(2021)
「정중하고, 세련된 혐오사회」 - 서울신문 스콘랩,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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