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 말 한마디를 품고 산다. 당장 처리해야 하는 공부와 과제부터, 인간관계와 자질구레한 걱정거리까지….‘여행’은 이런 ‘피곤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동의어로 쓰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훌쩍 떠나기에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수업과 과제와 연구로 바쁜 KAISTian들을 위해 본지는 ‘떠날 수 없는 자의 여행법’을 소개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고, 떠날 수 없다면 OO하라. 꼭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여행의 기쁨을 누릴 방법들을 함께 찾아보자. 
 

© 이윤지 기자
© 이윤지 기자

 

미디어 시대, 타자의 여행

일상을 떠날 수 없는 우리가 가장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여행법은 여행 관련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다.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엔데믹을 맞이하면서 다시 활성화된 각종 여행 예능과 다큐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최근 들어서는 여행과 관련된 유튜브 영상이 인기다. 여행 유튜버들은 기존 TV 여행 프로그램보다 더 친숙하고 현실적인 여행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이처럼 풍부한 영상 콘텐츠들을 통해, 우리는 집안 소파에 드러누워 남미의 오지나 인도의 길거리, 남극을 탐험할 수 있다. 혹자는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영미 문화권에는 직접 여행하지 않고 방구석에서 여행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Armchair Traveler(방구석 여행자)’라는 표현도 생겼다.

하지만, 이런 간접적인 여행법이 미디어가 발달한 오늘날에 새로이 나타난 개념은 아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여행이 모험에 가까웠던 시절에는, 승려 혜초와 마르코 폴로 같은 저자들이 펴낸 여행서를 읽으며 머나먼 곳들에 대한 상상을 키우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여행법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여행담을 듣는 이 유서 깊은 행위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탈여행’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탈여행은 믿을 만한 정보원을 시켜 여행을 대신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책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바야르는 오히려 이런 간접적인 여행법이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어떤 장소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상상력과 성찰을 꼽는다. 타인의 여행을 보고 우리가 그것을 재구성하는 것은 ‘타자를 감수하는 것’이다. 스스로 여행했을 때는 놓칠 수 있는 것을 타인의 관점으로 경험하는 것, 타인이 놓쳤을 어떤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더 풍부한 정신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작가 김영하는 그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출연한 특별한 기억을 ‘탈여행’에 빗대어 설명한다. 여행지에 도착한 출연자 4명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가 원하는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하루가 저물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여 각자의 여행담을 늘여놓는 것이 프로그램 촬영의 패턴이다.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이 아니다 보니, 프로그램에 관여하는 수십 명의 사람 중 여행의 전부를 직접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녁 식사 자리의 여행담을 듣고, 편집된 최종 방송 영상을 보면서 서로의 여행을 간접 경험할 뿐이다. <알쓸신잡>은 여행을 다녀온 출연자에 의해서, 그 여행 기록을 편집하는 편집자에 의해서 이중, 삼중으로 탈여행을 수행한다. 김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이 다녀온, 타인이 다녀온 여행을 여러 관점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편집된 영상을 통한 간접 여행의 의미를 논한다. 

우리가 어떤 곳을 여행하고 왔다고 해도 그 도시를 전부 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직접 다녀온 여행의 기억은 생생하지만 오히려 정리되지 않은 모호한 인상을 남긴다. 우리는 타자의 여행을 통해 좀 더 깊이 있는 여행을 경험할 수도 있고, 우리의 여행 경험을 더 명료하게 마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데는 다양한 매개가 존재한다. 타인의 여행을 듣는 것은 나의 여행만큼이나 값진 경험이다.
 

여행준비의 기쁨

지금 여행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떠날 수 있는 그날을 꿈꾸며 여행을 준비해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여행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양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여행준비의 기술>의 저자 박재영 작가는 자신의 취미는 ‘여행준비’라고 소개한다. 그는 여행 준비가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면에서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는 행위라고 말한다. 여행의 기회는 제한적이다.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가장 가 보고 싶은 도시의 목록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가장 가 보고 싶은 현대미술관 목록이나 해변, 경기장의 목록을 만들 수도 있다. 버킷 리스트가 될 수도, 허세 고백록이나 참회록이 될 수도 있는 이 목록들은, 내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본 영화 속의 낯선 지명에서, 우울한 날 보았던 영상에서, 우리의 주목을 확 끌어당기는 장소들을 발견한다.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우리 자신이 특별히 선호하는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장소들에 의해서 선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여행지를 꿈꾸는 것은 우리 안에서 낯선 목소리로 말하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같다. 장소들로부터 선택되는 상황에서 각자는 자신이 가장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감각과 기쁨을 제공해 주는 요소들을 재발견한다. 이처럼 여행지를 정하는 선택의 연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행복은 비생산적인 활동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마냥 놀 수 없는 우리는 생산적인 활동과 비생산적인 활동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여행준비는 이런 균형 감각을 길러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용한 활동이다. 너무 열심히 일만 하다가 현재의 확실한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별생각 없이 놀기만 하는 것 같다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박 작가는 비생산적인 활동인 여행의 명분을 성실히 마련하는 것이 균형있는 삶을 위해 중요하다고 말하며, 2가지 예시를 제시한다. 하나는 나이 또는 기념일 햇수의 앞자리가 바뀔 때나 학교를 졸업할 때와 같이 저절로 찾아오는 특별한 시점을 기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성취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미래의 명분 있는 휴식을 꾸준히 계획해 두어야 한다. 첫째로는 열심히 살아갈 동기가 되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행복한 순간은 그것을 성실히 계획하는 자에게만 찾아오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여행 찾기 

우리는 떠날 수 없는 우리네 일상을 좀 더 멀리서, 혹은 매우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여행과 연관시킬 수 있다.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서 찍은 푸른 구슬 같은 지구의 모습, 더 나아가 보이저 1호가 명왕성 궤도에서 촬영한 창백한 점에 불과한 지구의 모습은 인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뉴욕타임스에서 “저 끝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우리는 영원히 머물 수 없다. 멀리서 본 우리는 지구를 스쳐 가는 여행자일 뿐이다. 삶을 하나의 여행으로 바라보는 것, 타인을 또 다른 여행자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느긋한 마음가짐을 선사한다. 날씨가 궂어도, 여행 기간의 유한성은 우리를 삶으로 내몬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는 명언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여행자인 우리를 도왔던 먼저 도착한 이들의 환대를 기억한다면,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가 현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듯이,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벗어나고픈 일상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자. 우리가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에는 묵은 기억과 상처에서 멀어지려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데이비드 실즈는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라고 언급한다. 집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에서, 번질나게 드나드는 길목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추억이나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멀리 달아날 수 없다면 잠시 피해가는 방법도 있다. <아티스트 웨이>의 저자 줄리아 카메론이 내면의 창조성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아티스트 데이트’라는 방식을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의 내면은 어린아이와 같다. 매주 한 번씩 어린아이와 데이트를 하는 듯한 시간을 내어 본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어도 좋다. 평소와 다른 길로 걸어가는 정도의 작은 일일 수도 있다. 단지 반복해서 마주쳤던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고, 어린아이를 돌보기 위해 시간을 낸 어른의 마음으로 아이가 하고 싶었던 작은 일들을 들어준다. 일상에 잠시의 탈출구를 더함으로써 우리를 가두는 일상의 무의식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먹고 지리적으로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와 떠나고 싶은 곳에 대해 곰곰이 돌아본다. 우리가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움에 대한 갈증인가, 항상 성실한 당신에게 느껴지는 삶의 무거움인가, 기억의 축적으로부터 온 갑갑함인가. 그 마음을 출발점으로 두고,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새로운 여행법을 떠올려 보자.
 

© 이윤지 기자
© 이윤지 기자

 

 

참고문헌 |
<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글항아리(2020)
<철학자의 여행법>, 미셸 옹프레, 세상의모든길들(2013)
<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 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카메론, 경당(2003)
<여행의 이유>, 김영하, 문학동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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