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열 시에 남산타워 앞에서 보자고 약속한다. 그럼 아홉 시쯤에 나는 신분당선을 탄다. 음악을 들으며 풀린 동공으로 허공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 사람한테 연락이 온다. 타워 오르기가 귀찮으시단다. 그래서 그 앞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다. 내가 시간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너무 일찍 도착해 버릴 것 같아서 세 정거장쯤 일찍 버스에서 내리기로 결심한다. 역대급 폭염에 헥헥거리면서 용산구의 더럽게 가파른 경사를 저주한다. 그냥 일찍 도착해서 그늘에서 좀 기다릴 걸, 내 삶에서 내린 여러 선택을 후회하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를 흘리지만 여차저차 잘 도착한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 사십오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 사람은 결국 칠 분이나 늦으신다. 뭐라 할까, 생각도 해보지만 싸워봤자 내가 지기 때문에 조용히 있는다. 공원을 한 시간 정도 산책한다. 밖에서 손잡는 건 징그러우니까 남이 보면 원수 사이인가, 싶을 정도로 넓은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다. 시답잖은 얘기를 한다. 

밥 먹을 때 돼서 전날에 미리 찾아놓은 음식점에 간다. 사람이 많다. 그대로 뒤돌아서 걸어 나온다. 근처 이마트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아이스 컵에 담긴 음료를 점심 대신 먹는다. 뜨겁게 달궈진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다음은 어디로 갈지 정한다. 내가 계속 어린이대공원이 가고 싶다고 찡찡거려서 그 사람은 결국 내 말을 들어준다. 5호선에 탄다. 살면서 5호선에 타본 적이 있냐는 둥의 이야기를 나눈다. 어릴 적에 동생이 어린이 대공원에서 축구를 자주 해서 내가 많이 따라갔었다, 그 사람에게 내 어릴 적 이야기도 해준다. 내 동생 얘기야 아무 관심 없어서 당장은 흥미 있는 척하지만, 그 사람은 곧 까먹을 것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공원에 사람이 많다. 우리는 선크림을 바르고 다시 공원을 산책한다. 뛰어노는 어린이들을 보며 그 사람은 자기 사촌들이 생각난다면서 저번 추석 때 있던 일을 말해준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이의 가족을 욕하는 꼴이 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는 그저 웃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곧 내가 다리 아프다고 불평한다. 그 사람이 “업어줄까?”라고 물어보지만 그 역시 징그럽기 때문에 거절한다. 근처 메가박스에 가서 시간이 맞는 영화를 대충 본다. 나는 영화가 형편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카페에 대충 들어가서 한 시간 동안 죽어라 토론한다. 결국 그 사람은 자기의 의견을 관철한다. 

시간을 본다. 아뿔싸, 대전으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생각하지도 않고 놀아서 시간이 촉박하다. 사람이 택시를 잡아서 나를 역으로 보내준다. 남의 돈으로 타는 택시는 언제나 짜릿하다. 역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뛰니 기치에 늦지 않고 있었다. 여차저차 기숙사에 들어간다. 사람한테 도착했다고 연락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보낸다. 사람은 바로 "ㅇㅋ확인"이라고 답장한다. 3일만의 첫 카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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