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이 문장은 우리나라 헌법 제10조 1항에 적혀있다. 이러한 권리와 개념은 세계 어느 나라의 헌법에도 등장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하며,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존’ 이라는 단어는 곱씹어 보면 유독 그 의미가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존엄은 어떤 의미이며, 인간은 왜 존엄할까?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철학자로서 존엄에 대해 논하고, 또 소설가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문학 작품을 쓴 작가가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페터 비에리(Peter Bieri)의 생애와 그의 철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박정민 기자​
​ⓒ 박정민 기자​


페터 비에리의 두 이름 - 생애

<리스본행 야간열차(Night Train to Lisbon)>의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Pascal Mercier)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페터 비에리는 문학과 철학, 두 분야에서의 업적을 인정받는 스위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1944년 스위스 베른 교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베른에 있는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며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배우며 자라, 학교를 졸업하고는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때 여자친구를 따라서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영국 런던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으며, 런던과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오가며 철학과, 영미문학, 그리고 인도 문화를 공부했다. 그는 1971년에 디터 헨리(Dieter Henrich)와 어니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의 제자로써 시공간에 관한 철학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 그는 버클리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베를린 고등학술연구소 등을 거치며 계속해서 연구자의 삶을 이어갔다. 이후 페터 비에리는 독일 연구 재단(German Research Foundation)에서 뇌 및 인지에 관한 연구팀을 설립했고, 1993년부터 스승이었던 투겐트하트의 후계자로서 베를린 자유대학교(Freie Universitat Berlin)에서 언어철학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활발하게 학계에서 연구자로 지내던 그는 2007년, 제3자가 출자한 연구비에 장악당하여, 경제적 효율성에 의해 움직이는 학계에 환멸을 느끼고, 이를 ‘바쁨의 독재’라고 비판하며 학계를 떠나게 된다.

학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쌓는 중에도, 그리고 학계를 떠난 이후에도 페터 비에리는 활발한 대중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이 시대의 자유 민주주의 사상이 직면한 도전을 포함해 문화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광범위하게 글을 쓰고 생각을 밝혀왔다. 그의 인터뷰와 에세이는 언론과 잡지에 실리며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그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그의 철학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이 아니라, 필명 파스칼 메르시어로 등장한 소설가로서의 활동이었다. 그는 2004년 <리스본행 야간열차>을 펴냈다. 소설은 편안한 삶을 버리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자아 발견의 여행을 떠나는 스위스 고전 교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독일어권 국가에서만 200만 권이 넘게 팔렸고, 이후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면서 꾸준히 회자되는 현대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비에리는 그 후로도 4권의 소설을 더 펴냈으며, 작품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의 철학적 통찰력을 문학적 기술과 결합해냈다. 그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정체성, 도덕성, 그리고 의미에 대한 질문과 싸우고 현대 생활의 복잡성을 헤쳐 나가는 것에서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중략) 어부들이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는 더듬거리는 에스파냐어로 두 번 더 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걸!”

-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존엄성은 곧 삶의 방식, <삶의 격>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결국은 인간답게 사는 것,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담은 책이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인간의 가장 큰 정신적 자산인 동시에 삶 속에서 가장 위협받기 쉬운 가치이기도 한 존엄성을 지키며 어떻게 품격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문제 제기를 거듭하는 책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철학적으로 풀이하고 일상과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문화적 장르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는 대중적인 접근을 통해, ‘삶의 품격’이라는 다소 어려운 주제에 대해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책은 다른 철학책들이 심오하고 난해한 이론으로부터 논리를 펴나가는 것과 다르게 인간의 평범한 삶에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존엄성’을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법’이자 ‘사고와 경험, 행위의 틀’이라고 설명한다. 즉,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삶의 격>에서는 삶에서 만나는 주요한 문제에 따라, ‘존엄성’을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진정성으로서의 존엄성, 자아 존중으로서의 존엄성 등 8가지로 나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단순히 이용당하는 존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내가 아닌 타인이 정해놓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존재 자체로 목적이 되길 원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무시당하는 대상이 된다거나 짓밟힌다고 느끼게 된다. 저자는 여행 중에 어느 큰 장터에서 ‘난쟁이 멀리 던지기’ 대회를 목격했다. 힘이 센 사내가 난쟁이를 들어 올려 온 힘을 다해 매트리스 위에 패대기치는 것이었다. 모여든 군중은 난쟁이가 던져질 때마다 즐겁게 환호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심지어 주최 측은 난쟁이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 괜찮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여기서 난쟁이는 더도 덜도 아닌 덩어리, 즉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도 하나의 주체라는 점이 간과되고, 단순한 물체로 격화되어 존엄성의 상실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목적으로 취급받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또는 ‘돈을 벌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당하는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은 예시는 과연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결정하는 나만의 자유, <자유의 기술>

<삶의 격>에서 존엄성을 더없이 중요한 가치로 언급하고 이를 위한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강조한 저자는 <자유의 기술>을 통해 의지와 자유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자유에 대해 논하기 위해 그 반대인 부자유한 상태를 다양한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도끼로 내리쳐 살인한다. 소설 속에서 지금까지 자라온 환경에 의해 형성된 엘리트주의적인 성격, 돈에 쪼들려 궁지에 내몰리게 된 당시의 상황 때문에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라고 합리화하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책임을 묻는 이야기는 그가 가진 자유를 추적해 가는 과정이다. 한 사람에게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그 사람이 행위를 결정할 자유가 있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항상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린다. 바꿀 수 없는 지난날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고,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하는데, 과연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하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에 관해 묻는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는 지금의 우리를 결정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래까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여유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경우의 수가 적을지라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가 의지의 주체임을 잊지 않고서 상황에 대해 숙고하고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순수한 주체로서의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배경이나 그 삶에서 연유한 조건성의 핑계를 댈 수 없게 된다. (중략) 나도 어쩔 수 없어, 라는 말로 자신을 향한 비난이나 원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러분이 저지른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에 대해 이제는 양심의 가책, 후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중략) 여러분은 진짜 결정을 내리는 진정한 도덕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 <자유의 기술> 중


이번 기사에서는 페터 비에리의 생애와 그의 철학에 대해 살펴봤다. 그의 철학은 특별히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거나 혁신적인 생각을 발명해내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태도로서의 철학’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가길 바란다.

 

ⓒ 박정민 기자
ⓒ 박정민 기자

 

 

참고문헌 |
<삶의 격>, 페터 비에리, 은행나무(2014)
<자유의 기술>, 페터 비에리, 은행나무(2016)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들녘(2014)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