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의 선생님들에게 듣는 독특한 이야기, 강연과 함께하는 하루를 즐기며 여유 시간에 사소한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믿고 듣는 음악, 후추처럼 기분 좋은 자극을 주는 2인조 인디밴드 페퍼톤스를 만났다. KAIST 전산학부 출신의 두 졸업생, 신재평(이하 신)과 이장원(이하 이)으로 이루어진 페퍼톤스는 강렬하고 상쾌한 사운드를 거쳐, 묵직한 청춘의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두 선배가 속해 있었던 KAIST의 두 밴드 동아리, 강적여섯줄 동아리와 함께 페퍼톤스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페퍼톤스의 음악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알아보며 교내에서 밴드로 활동하고 있는 학생들,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 또 다른 페퍼톤스를 꿈꾸는 학생들이 선배들의 경험에 공감하고 조언을 얻어가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예전의 인터뷰에서,‘페퍼톤스’란 밴드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후추(pepper)처럼 기분 좋은 자극을 주는 음악(tones)을 추구하는 밴드”라고 답변해주신 내용을 봤었어요. 
데뷔한 지 19년이 되어가는 지금,‘페퍼톤스’란 밴드의 이름이 가지는 정체성이 무엇인가요?

데뷔 초기에는 페퍼톤스에 대한 이런저런 정의들을 많이 내렸습니다. 처음이니까, 컨셉을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을 노래하지 않겠다, 기쁘고 신나는 음악만 만들겠다, 등의 규칙을 정해 놓고 노래를 만들었지요. 그런 컨셉이 곧 정체성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 둘이 만드는 노래들이 곧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깨달았습니다. 우리 둘의 이야기와 생각이 곧 페퍼톤스인가 봅니다.
 

이장원 선배님의 추억이 담긴 KAIST 어쿠스틱 보컬 동아리, 여섯줄에서 제공한 질문입니다.

잘 닦인 학업이란 길을 벗어나서, 음악이라는 불확실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났었나요?

이: 처음에는 학업과 병행하고 싶었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에, 모든 길을 열어 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큰 욕심이고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하면서 후회되거나 포기하고 싶으셨던 순간도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힘들었던 순간이야 있었지만, 능력 좋은 친구와 함께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자부심이 워낙 강해서 후회되거나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습니다. 음악적 자존감이 높았다고나 할까요.

취미로 음악을 하는 것과 아티스트로서 대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이: 우리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자며 시작했지만, 이제는 우리만의 음악이 아니라 아껴주고 기대를 해주시는 모든 고마운 분들을 만족시켜 드리고 싶은 부담감이 있습니다.

동아리(여섯줄) 활동이 가수가 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이: 큰 영향이 있었습니다. 여섯줄 동아리 회원들과 화성학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했고, 아무래도 기타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악기다 보니 동아리방과 기숙사 등 어디서든 연습할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죠.

이장원 선배님, 많은 밴드 중 여섯줄을 선택하셨던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이: 음악 동아리에 가입할 생각이 처음에는 없었는데, 고등학교 때 함께 기타 치며 놀던 친구들이 우르르 가입했고, 앞구르기만 해도 붙여주니 용기를 내라는 권유가 너무 웃겨 3차 오디션(?)에 응시하고 가입했습니다.
 

신재평 선배님의 추억이 담긴 카이스트 하드락 밴드 강적에서 제공한 질문입니다.

KAIST를 다니며 강적과 학업을 병행한 비법이 무엇인가요?

신: 저는 학교 다니면서도 거의 음악 생각만 했었는데요. 많은 강적 선후배들이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고, 또 강적뿐만 아닌 많은 학우들의 고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자기의 한정되어 있는 시간을 일과 취미 혹은 연애 등등 다른 영역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하느냐의 문제는 살면서 여러 가지 시도와 경험을 하며 배워나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생은 그 첫 시작을 하는 시기이고요. 저처럼 학업보다는 학업 외 좋아하는 분야에 시간 투자를 몰빵하다가 그게 곧 직업이 되는 케이스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바람직하다고 하긴 어렵고. 그저 다양한 시도와 성장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밸런스를 찾아내시길 응원합니다.

처음부터 프로 뮤지션을 목표로 하셨나요?

신: 3학년 때쯤 친구들이 진학, 취업, 군 입대 등 거취를 결정하기 시작했고 그즈음 동아리 선배들이 앞일을 묻길래 음악 해보려고 한다고 했다가 된통 혼났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뭐가 됐든 앨범 한 장은 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왠지 몰라도 잘될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꾸준하게 습작하고 연습할 수 있었습니다. 순수하고 멍청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고 지금 와서 다시 그때를 살라고 하면 그렇게 하나만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KAIST를 떠나 밴드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거나 후회되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신: 운 좋게도 데뷔 초부터 대중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후회한 기억이 없습니다. 앨범 한 장 한 장 만들 때마다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고갈되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만 긍정적인 창작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프로뮤지션으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신: 처음에는 강적 활동과 병행하여 따로 친구들끼리 자작곡을 연주하는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대전의 로컬 클럽들에서 주말마다 연주를 하며 활동하다 3학년 때 해산하였습니다. 이후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을 수행하게 되었고 첫 월급으로 홈 리코딩 장비를 샀습니다. 꾸준히 습작을 하며 당시 밀림이라는 사이트에 습작 곡을 올리며 지내다가 스물세 살 때 친구 이장원과 뜻을 모아 페퍼톤스를 결성하고 만든 6곡의 데모가 홍대의 인디 레이블 ‘카바레사운드’의 눈에 들어 ‘a preview ep’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스물다섯 살 때 복학했고 그해 1집을 발표했습니다. 이듬해 졸업했는데 따로 아무 데도 취업하지 않았으니 백수 아니.. 프로 뮤지션..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강적에서의 활동이 이후의 음악 활동에 도움이 되었나요?

신: 학교 다닐 때 저녁 시간을 동방에서 홀로 많이 보냈습니다. 드럼도 쳐보고 신시사이저도 배우고요. 또 공연 때면 연주 합주뿐 아니라 악기 나르기, 무대 세팅, 엔지니어링까지 공연 전반을 두루 경험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카이스트에서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기가 어려우셨을 텐데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신: 당시에는 실용음악과가 생기기 전이었고, 대다수의 뮤지션들이 비전공자였던 시기라 다들 비슷했습니다. 알음알음으로 배우고 잡지 보고 배우고 서점에서 전문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선배 만날 기회 있으면 물어보고요.

신재평 선배님, 당시 카이스트 밴드 중 어디가 가장 잘했나요?

신: 나 이뻐? 같은 질문을 하다니. 당연히 강적입니다. 강적은 최고니까요.
 

페퍼톤스의 곡들을 듣다 보면, 굉장히 들뜨고 희망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이런 페퍼톤스 특유의 느낌은, 두 분의 경험들에서 비롯된 건가요?

이: 경험과 아주 동떨어져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즐거운 일과 생각들을 극대화하는 데에는 상상력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 발단이 되는 것은 어떤 감정이든 작은 키워드이든 직접 경험한 것에서 나오게 되는데, 이것들을 잘 기억하고 때론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꺼내어 다듬고 상상의 살을 붙여 가사로 만듭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앨범들 속에서 수많은 곡들을 만드셨어요. 이런 곡들 증에서, 만들면서 가장 뿌듯했던 곡이 어떤 것이었나요?

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결과가 만족스러울 때 짜릿함이 있습니다. 최근 7집 앨범 Thousand Years를 작업하면서 콰이어 코러스를 입힐 때가 참 뿌듯했습니다.

신: 모든 곡마다 그 당시의 아이디어와 새로운 시도, 노력이 배어 있습니다. 각기 다른 빛나는 지점이 있어서 하나를 뽑기는 참 어렵습니다.
 

이번에 내신 디지털 싱글, Freshman 너무 잘 들었습니다. 특히 MV에서, 두 분이 과거로 돌아가 교복을 입고 연기하는 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청춘 시기만의 느낌을 너무 잘 담아내셔서, 저도 작년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두 분은 이번 곡을 만들면서, 과거 새내기 시절의 어떤 추억을 떠올리셨나요?

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정해진 대로 생활하다가 대학생이 되니 참 어른이 된 기분이었고,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도 되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던 기분을 떠올렸습니다. 대학생 때를 생각하며 작업을 했는데, 뮤직비디오를 교복을 입고 찍을 줄은 몰랐지요.
 

새내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작업하셨다고 하니까 떠오르는 질문이네요. 두 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KAIST의 장소는 어느 곳이었나요?

이: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진 모르겠는데, 대낮에 CC동산 살짝 언덕진 어딘가에 재평이를 비롯한 친구들과 자주 누워있곤 했습니다. 2집 앨범 new standard의 new hippie generation 가사가 그 장소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늘 시커멓게 타 있었는데, 재평이는 언제나 뽀얗더라고요. 신기했습니다.

신: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게임음악을 만든 적이 있는데 엔딩곡 이름을 엔들리스 로드로 지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넓고 조용하고 녹지가 많은 캠퍼스입니다. 산책하고 명상하기에 참 좋은 곳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발매하신 7집 앨범도 너무 좋아하는 앨범입니다. 정말로 “페퍼톤스가 페퍼톤스했다.”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예요. 음악을 듣는 그날의 감상과 경험에 따라 앨범 전체를 듣고 느끼는 생각이 많이 달라지곤 해서요. 특히, 쓸쓸한 분위기의 곡 속에서 시적인 표현을 넣은 것이 앨범 전체의 분위기를 한층 더 깊게 만들어주는 느낌을 받았어요. 평소에 곡을 만드실 때, 가사에 쓰는 단어나 표현은 주로 어디에서 비롯되나요?

신: 그간 들었던 말들, 읽었던 글들 기사들, 어딘가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다듬고 바꾸고 연결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한 달 내내 메모장만 쳐다보며 완성한 가사들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질문을 쓰고 있는 오늘이 페퍼톤스의 19주년이에요. 어느새 페퍼톤스 밴드도 곧 성년이 되는 나이가 되었네요. 10대의 마지막 한 살을 불태우는 페퍼톤스 밴드만의 새로운 목표가 있을까요?

이: 19주년이라니 정말 이제는 매년이 기적 같고 감사합니다. 일단은 20주년을 잘 맞이하는 것이 우리 목표입니다. 뭔가 특별한 것을 준비하고 싶은데, 그게 무엇이 될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치열하게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해지면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달리는 올해가 되겠지요.
 

2003년, 카이스트 졸업생 출신의 두 학생이 따분함을 잊기 위해 모여 만든 인디밴드가 어느새 19주년을 맞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페퍼톤스의 음악은 그 속에 항상 밝고 긍정적인 가치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1집 [COLORFUL EXPRESS]의 <Ready, Get Set, Go!>와 함께 시작해서, 4집 [beginner's luck] 속 <21세기의 어떤 날>을 거쳐 다시 디지털 싱글 <Freshman>과 함께 새내기로 되돌아오기까지의 모든 과정 속에서 페퍼톤스는 매 순간마다의 감정과 경험을 녹여낸 희망찬 가사와 멜로디로 듣는 이를 내심 들뜨게 만드는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 보였습니다.

바쁜 공연 일정과 창작 활동 중에도, 교내 밴드로 활동하고 있는 학생들을 비롯해, 음악으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얻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흔쾌히 본인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내어준 페퍼톤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번 인터뷰를 읽는 독자분들도,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21세기의 어떤 날이 아름다운 한 날의 추억으로 남아 다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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