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우리는 하얀 꽃을 놓는다. 광장 한쪽에 처져 있는 천막 안에는 웃는 얼굴이 담긴 사진 액자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촛불이 켜져 있다.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비통함을 견디며 애도와 추모의 시간을 견뎌낸다. 어떠한 재난 혹은 사고가 있고 난 뒤 희생자들을 위해 마련된 추모 공간과 자리를 지키는 유가족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추모의 공간은 지나가던 사람들의 마음마저 먹먹하게 만들어 잠시 멈춰서서 생각하고, 그들에게 못다 전한 말을 쪽지에 적어 남기게 한다. 나라를 지키던 젋은 용사들이 포탄에 희생되었던 사건, 잊을 수 없는 9년전 세월호 침몰 사고, 생활고에 못 이겨 한 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가족의 모습,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지난 10월의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 사회는 가슴 아픈 사건들을 지고 나아간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희생자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의미로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이번 기사에서는 우리가 겪는 상실과 애도의 의미에 대해 다룬다. 애도가 갖는 가치와 애도에 대한 태도, 그리고 우리가 사회적인 애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러스트 | 오예원 기자
일러스트 | 오예원 기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애도의 의미

우리는 애도의 마음을 표할 때 보통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을 쓴다. 이 문장을 분석해보면 추모와 애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우선 ‘삼가’는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존중과 위로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미를 보여준다. ‘고인’은 사람 인(人)의 앞에 어떠한 까닭이나 인연을 의미하는 연고 고(姑)를 붙인 단어로,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명복’을 기원하는 것은 어두울 명(冥)과 복 복(福)을 합친 말로 저승에서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의 불교적 표현이다. 그 때문에 종교적인 맥락을 고려해 기독교에서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이 아닌 ‘조의(弔意)’를 표하거나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길 기원하기도 한다.

애도를 쉽게 정의하자면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로는 나와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나 나에게 중요한 사람의 심한 정신적 고통과 불운을 슬퍼하는 마음의 표현을 포함한다. 애도는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다.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애도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애도는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하며 애도의 과정을 적절히 겪지 못하면 이후 복잡한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다. 비탄의 과정이 비정상적으로 오래 지속돼 몇 년이 지나도록 슬픔에 잠길 수 있고, 사별한 후 수년 후에 느닷없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격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심한 경우 신체적 질병이나 이상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애도는 이야기하는 일이다. 우리는 애도하는 동안 안타까운 일과 우리 곁을 떠나신 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기억하며 슬퍼함으로써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비탄이 입을 열지 못하면, 미어지는 가슴에 터지라고 속삭인답니다.” - <맥베스-셰익스피어> 중
 

함께 눈물을 흘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적 애도

우리 사회에 닥친 사고나 재난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추모와 애도는 개인적 감정을 넘어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다. 사회는 애도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집단적 차원에서 희생자들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려는 의도로 여러 애도의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한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가 7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애도는 비극적인 사건이나 사고로 인한 슬픔과 충격을 사회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이를 함께 표현하고 나누는 과정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정서적 회복을 도모하는 효과가 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고 나눔으로써,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경험을 하고 서로를 지지한다. 하지만 사회적 시스템을 통해 죽음과 애도를 공적인 일로 치환할 때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흐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국가, 사회, 단체 등 집단이 애도의 주체가 된다면, 희생자들의 죽음과 슬픔마저 집단의 것으로 회수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애도는 각각의 이야기와 진심 어린 마음이 전달되는 일이어야 한다.
 

가슴 한쪽에 검은 리본: 애도의 문화

검은색이 애도와 슬픔의 상징성을 얻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 로마와 그리스의 문화에서부터였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는 검정색을 죽음과 사후 세계를 상징하는 색으로 여겼다. 이후 중세 유럽에서 검은 옷을 입거나 검은 띠를 매고 추모와 애도를 표현하는 것이 보편화되었고 검은 리본으로 애도를 표하는 문화는 오늘날까지 많은 국가에 이어져 왔다. 서구사회에 세계적 충격을 안겨준 2001년 9/11 테러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국에서는 건물이나 차량 등 많은 물건에 검은 리본이 달려 그들의 슬픔과 애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희생된 많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업로드된 검은 리본을 볼 수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정부도 이태원 참사에 대해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검은 리본 패용을 통해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삶은 웃음을 품고 계속되어야 한다: 애도의 형태

재난이 발생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많은 재난과 불운을 겪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애도와 추모의 방식으로 축제나 웃음을 활용해왔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남수단의 소년병이었던 쿠에 뎅 아텀은 이제 수단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할 평화를 위한 코미디를 만드는 코미디언이 됐다. 그는 코미디가 많은 남수단인들이 5년 반의 내전을 겪은 후 느끼는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고 그들이 과거의 아픈 경험을 잊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말한다. 지난 2016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인 <The Last Laugh>는 역사상 최악의 학살 사건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머를 이야기하고 전쟁 후 삶에서 어떻게 즐거움을 찾아야 할지 이야기한다. 나치의 수용소 안에서도 수용자들 사이에 유머가 흔히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재난과 사고를 지나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선 결국 마지막엔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비가 온 뒤 땅은 굳는다: 애도의 영향

일반적으로 죽음과 사별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최악의 불행이라고 생각된다. 그 때문에 애도 또한 고통스럽고 불편한 부정적인 경험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애도는 여러 차원에서의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사별 등의 다양한 심리적인 외상이 긍정적 변화를 촉발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외상 후 성장(PTG: post traumatic growth)’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애도는 개인에게 성장이라는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심리적인 외상 사건을 겪은 후 애도의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 주변인과의 관계가 좋아지거나 가치관이 개선되는 모습이 심리학적 연구에서 종종 보고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애도는 사고가 있고 난 후 마음속 부서진 세계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도를 거치며 우리는 회복과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심리적 다차원 영역의 성장에 도움을 받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하얀 꽃을 내려놓을 때엔: 적절한 애도에 대해

이제 다시 하얀 꽃을 내려놓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우리의 곁에서 일어난 사고는 나와는 관계없는 타인의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재난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커다란 슬픔과 고통에 대해 애도를 표하는 방식이 그 사람들과 사회의 품격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비통함의 시간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애도할 때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각자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듯, 각자가 필요로 하는 공감이나 위로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재난이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슬픔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재난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애도의 시간을 건너야 한다.
 

일러스트 | 오예원 기자
일러스트 | 오예원 기자

 

참고문헌
<애도-심리학으로 말하다>, 리처드 그로스, 돌배나무(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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