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the giver)라는 책을 읽어 본 적 있나요?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어 날씨도 없이, 자유의지도 없이, 심지어 색깔도 없이 살아가는 사회를 그린 소설입니다.

집 한켠에서 이 책을 찾아 오랜만에 읽고, 흑과 백뿐인 세상에서 나와 을 발견하고 나아가는 주인공이 어쩌면 지금 나이대의 저와 제 친구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이스트에 다니다 보면 대부분의 친구들이 비슷한 줄기의 삶을 살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잔가지는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그 누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학교 시절 고된 공부를 통해 과고, 영재고, 자사고에 진학하거나 또는 일반고에 진학하여 수학 기간 내내 상위권을 차지한 친구들이 대다수죠.

이과계의 친구들은 꽤 나이가 들 때까지 내 직업으로 합당한 것은 과학자’, ‘의사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잘하는 과목에 따라 꿈이 분화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실질적인 직업이라기보다는 허물뿐인 계획에 가깝습니다. 그러다, 학부 졸업을 목전에 맞이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진짜 직업을 찾아 고민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폭죽처럼, 함께 한 갈래로 나아가다 어느 순간이 되면 뻥 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의 불꽃이 멀어지고 있는 것을 더 실감합니다. 5~6년 차이 나는 선배들을 만나면 그들은 이미 각자의 위치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방송, 의료, 패션 등 참으로 다르고 또 다양한 총천연색으로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나와 똑 닮은 그림 한편을 그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의 손을 시작으로 밑그림을 그려내어, 자아가 성숙해진 뒤로는 살아오면서 확보한 물감들로 외로운 채색을 이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팔레트를 한 번 들여다보세요. 마음에 드는 찬연한 색이 충분한가요? 혹시 미리 짜둔 물감이 말라있거나 단조로운 색감들로만 가득하지는 않나요?

원하는 색의 물감을 얻거나 신선한 색조를 더하고 싶다면, 가장 쉬운 방법은 유의미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세상에 용감하게 첫발을 내딛고, 그것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내력으로 치환될 때 비로소 우리는 팔레트에 한 가지 색을 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처럼 사회의 기대를 잘 충족시키며 살아온 사람일수록 안전한 세상을 탈선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새로운 물감을 사용하는 것에 큰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걸음의 방향을 어디로 내디딜지 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에 큰 피로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조금 먼저 어른이 된 사람들을 보며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조금씩 용기를 내어 저도 과감한 채색을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인생화의 완성은 없습니다.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완결만 있을 뿐. 그러니 완벽할 수도 없습니다. 실수로 붓을 놓칠 수도 있고, 틀린 색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자리가 그 자체로 미학이 되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색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수채화가 아니라 매 순간이 쌓여서 만들어진 유화니까요.

인생화(人生畵). 우리들. 삶 위에 유채. 2###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