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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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여러분은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그다지 가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미 여러분의 머릿속에 벌써 몇 가지 선택지들이 지나갔으리라 생각합니다. 한정된 시간은 생의 우선순위를 온통 뒤바꾸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여기 남다른 선택을 한 과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피터 스콧-모건 박사(Dr. Peter Scott-Morgan)입니다. 그는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음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장기를 기계로 교체하는 사이보그 인간 프로젝트에 도전합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단 2년. 그는 주어진 시간을 모두 바쳐 세상을 바꾸어 보기로 결심합니다.
 

불공평한 현실과의 전쟁

피터 스콧-모건 박사는 영국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명문 사립학교인 킹스 칼리지 스쿨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습니다. 학교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펜싱을 잘했고, 예술적인 감각도 뛰어났으며, 무엇보다 과학적인 호기심이 넘쳤죠.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나 다름없었습니다. 얼마 후면 학생 대표로 뽑힐 예정이었고, 펜싱부 주장 자리를 넘겨받을 예정이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명문 대학에 진학하여 유력 인사가 될 수 있었죠.

그러나 스콧-모건 박사가 학교 펜싱 경기에서 차기 주장으로 인정받은 날, 그는 교장 선생님의 호출을 받게 됩니다. 교장 선생님은 그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학생 대표로 선발될 수 없으며, 펜싱 주장 역시 될 수 없다고 통보했죠. 그의 특징은 순식간에 고쳐야 할 병이자 주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커다란 결격 사유로 변모했습니다. 박사는 좌절했지만, 세상에 순응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냈죠.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진학해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기로 한 것도 그런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임페리얼 칼리지에 진학한 후, 스콧-모건 박사는 인생을 걸 수 있는 낭만적인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는 연휴를 보내기 위해 토키(Torquay)로 떠났다가 호텔의 부지배인으로 일하던 프랜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머지않아 그의 부모님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들은 프랜시스와의 관계만 포기한다면 그의 성향을 이해해보겠다고 제안했지만, 스콧-모건 박사는 로봇 공학을 독학하겠다는 사유를 들어 대학을 휴학하고 프랜시스에게로 떠납니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자신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박사 학위를 얻길 바랐습니다. 프랜시스는 호텔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들은 런던으로 돌아가 근근이 생계를 이어 나가며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스콧-모건 박사는 로봇 공학자이자 행동 알고리즘 전문가로 활동하며 정부와 기업을 움직이는 역학인 ‘암묵적 규칙’을 해독했으며, 몇몇 회사의 경영 자문을 맡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법이 개정되어 그들이 영국 최초의 시민 동반자(Civil partner)가 될 때까지 그들은 줄곧 함께했습니다.
 

ALS인가, PLS인가?

이변은 소리 없이 찾아왔습니다. 북극광을 보러 여행을 떠났던 날, 스콧-모건 박사는 오른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증상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다리가 마비되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고, 증상은 이내 왼쪽 다리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지만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가능성을 하나씩 제거해간 끝에 그가 진단받은 병명은 근위축성측삭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이었습니다. 흔히 루게릭병이라고도 불리는 이 질환은 운동뉴런장애(Motor Neuron Disease, MND)의 한 유형으로, 운동신경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되는 희귀 질환입니다. 대뇌 피질의 위운동신경세포와 뇌줄기 및 척수의 아래운동신경세포 모두가 전체적으로 파괴되는데, 이에 따라 서서히 사지 쇠약 및 위축이 발생합니다. MND의 또 다른 종류로, 근육 소실이나 척수 운동신경의 퇴화가 일어나지 않는 원발성측삭경화증(Primary Lateral Sclerosis, PLS)와는 다른 점이죠. 특히 혀 근육이 부분적으로 수축하면 식사할 때 음식을 삼킬 수 없게 되며, 흡인성 폐렴이 발생하기 쉬워집니다. 가로막과 갈비사이근이 약해지면 호흡곤란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ALS는 현재까지 발병 원인과 치료법이 밝혀지지 않아 불치병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절망하지 않고 ALS 환자의 사인에 집중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MND 환자의 90%는 5년 이내에 사망하지만, MND 환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ALS 환자의 대부분은 굶어 죽거나 질식사합니다. 하지만 환자의 소화관이나 폐에는 기능상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는 이 점에 주목하여, 기계 장치를 이용한다면 MND를 불치병이 아닌 만성질환처럼 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ALS가 가혹한 질병임을 인정했습니다. 꼼짝할 수 없이 눈만 움직이며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콧-모건 박사는 한 가지 계획을 떠올립니다.
 

인간 사이보그가 되기 위한 준비

우선 박사는 필요한 모든 장기를 기계로 대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MND 환자의 가장 큰 난관인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한 것이죠. 그는 트리플오스토미(Tripleostomy)를 통해 위와 결장, 방광에 관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기로 결심합니다. 그런 뒤 후두를 적출하고 음식물을 주입 받는 관을 삽입해 간병인의 도움 없이 인간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리적인 움직임은 특수 제작된 휠체어인 ‘찰리’로 대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목소리를 잃었지만, 그는 로봇공학자다운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샘플 음성을 녹음한 뒤, 딥러닝으로 실제 목소리와 유사한 합성 음성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소통을 돕기 위해 자신의 얼굴과 유사한 아바타도 개발했습니다. 얼굴 근육이 마비될 것을 대비해 우선 표정을 기록한 뒤, 인공지능 전문가와 로봇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아바타를 통해 감정을 보여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합성 음성과 아바타를 아이 트래킹(Eye-tracking, 시선추적) 기술과 접목하여 그가 눈을 움직이면 AI 시스템을 통해 아바타가 목소리와 표정을 재연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피터 2.0’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AI와 융합한 최초의 인간, 피터 2.0

사이보그(Cyborg)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생물(Organism)의 합성어로, 기계와 인간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인조인간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콧-모건 박사는 인류 최초의 사이보그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을 ‘피터 1.0’, 로봇화한 새로운 육신을 ‘피터 2.0’이라고 구분해 불렀습니다.

이렇게 AI 기반 의사소통을 발전시키는 과정에는 인텔(Intel)의 라마 나흐만(Lama Nachman)의 연구팀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연구팀은 같은 병을 앓았던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의사소통을 도운 바 있었습니다. 호킹 박사가 사용한 음성합성 기술(ACAT) 오픈소스 플랫폼은 키보드 시뮬레이션과 단어 예측, 음성 합성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도왔습니다. 차이점도 있었습니다. 호킹 박사는 뺨에 있는 미세 근육으로 안경의 센서를 움직여 컴퓨터에 원하는 문장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의사소통했다면, 새 플랫폼에는 컴퓨터 화면에 있는 글자를 응시해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시선 추적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더불어 단어 예측 기능을 이용해 빠르게 대답을 선택하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우주의 암묵적인 법칙

스콧-모건 박사는 스스로의 몸에 갇힌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랐습니다. ALS 환자만이 아니라 사고나 질병, 노화 등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진 모든 사람이 과학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소통하며 살기를 원했죠. 그는 거듭해서 진화하는 과학을 신뢰했으며, 인간은 규칙을 깨는 존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여주었던 그의 배우자 프랜시스를 떠올리며 사랑이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평생 믿어온 우주의 암묵적인 세 가지 법칙이었죠.

그는 AI가 자신의 시선을 읽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정확하게 예측하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들으며 정확한 반응을 지시하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AI의 성능은 2년마다 두 배씩 증가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상현실은 게임 업계의 도움을 받아 현실감을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고, 10-15년 정도가 지나면 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는 인터페이스가 시선 추적 장치의 속도와 정확성을 능가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뇌와 AI를 융합해 완벽한 사이보그인 ‘피터 3.0’이 되기를 꿈꿨습니다.
 

피터 스콧-모건 박사는 2022년 6월 15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의 통념을 뒤집기 위해 사회의 벽과 평생을 싸워온 그에게 삶을 위한 투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스콧-모건 박사가 아바타의 모습으로 진행했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합니다. 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고난을 마주했을 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법칙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은 희망을 주고, 희망은 에너지를 만듭니다. 에너지는 해결책을 창조하며, 해결책은 미래를 다시 쓸 수 있게 만듭니다. 좌절해 있는 순간에도 우주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입니다.” 그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가 여러분께도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참고문헌
<나는 사이보그가 되기로 했다>, 피터 스콧-모건, 김영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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