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 「중경삼림」

(주) 엔케이컨텐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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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볼 때 대사를 유심히 보기를 좋아한다. <중경삼림>은 유독 명대사가 많다. 여러 대사 중 “이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대사가 참 좋다. 어렸을 때부터 시간이 가장 무서웠기에 시간과 똑바로 마주하고도 살아남는게 있을지 항상 궁금했다. 지구의 어떤 것들도, 여러 추상적인 개념들도, 이를테면 절망, 사랑, 슬픔, 고독 같은 것들도 시간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세상 모든 것은 통조림과 같아 유통기한이 있다. 때론 그 점이 좋다. 어떤 고통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테니까. 때론 슬프다. 지금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 사라질 테니까. 그렇기에 영화에서 하지무가 어차피 유통기한이 있을 거라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말이 참 안타까우면서도 좋았다.

663과 하지무의 행동은 나를 떠올리게 한다. 663은 편지를 두 번 받는다. 전 연인에게 한 번, 페이에서 한 번. 두 편지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날 때 주고 간 것들이다. 그는 편지 보기를 계속해서 미룬다. 하지무는 만우절에 이별했다. 그는 자기가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를 닮지 않아서 헤어졌다고 여겼고 한 달 뒤인 5월 1일 그녀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통조림을 매일 모았다. 663은 전 연인이 건넨 편지의 내용을 대충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무도 그녀가 다른 이유로 자신을 떠났고 5월 1일이 와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다. 둘 다 사실을 외면한 채 애써 아니라며 회피하려 했다. 나도 진실이 너무 두려울 때면, 내심 깨닫고 있으면서 그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고 진실을 마주하기를 회피한다. 그들에게서 겁 많은 나를 봤다.

왕가위 작품에서 ‘방’은 소재다. 그의 영화에서 방은 주인의 마음을 대변한다. 2부에서 663의 방이 그렇다.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자 방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같이 슬퍼했다. 페이를 만난 후 자각을 하기도 전에 방은 어느새 페이의 물건들로 채워졌다. 마침내 그는 방에 있는 페이와 마주했고 663은 데이트를 신청한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후 평생을 슬퍼할 것처럼 굴면서도 그 또한 유통기한이 있기에 다시 사랑을 하게 된다. 그 때가 오면 감정을 비롯하여 사람 전체가 자신의 마음속에 천천히 스며들고 뒤늦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이토록 아름답고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재밌다. 예쁘다! 무엇보다 ost가 매우 좋다. 여운이 오래가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강렬한 ost다. 여주인공들마다 있는 테마곡은 다른 설명 없이 듣기만 해도 캐릭터의 특성을 알 수 있게 해주고 듣기만 해도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감정을 되살아나게 해준다.  아직 날이 찬 2월, 홍콩만의 여름 향기를 청춘이 가득 담긴 <중경삼림>을 통해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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