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마다 돌아오는 ‘햇빛의 날’ 오후였다. 예정보다 기압이 느리게 올라가는지 군데군데 새하얀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빛살은 이 정도 구름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쏟아져 내려왔다. 하늘은 더 깨끗해질 것이다. 구름이 다시 뿜어져 나오는 저녁 9시가 되기 전에 서두르면, 올해 마지막으로 시리우스가 서쪽 지평선으로 지는 모습을 배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름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한다. 햇빛과 별빛이 나흘에 한 번만 보이게 하는 태생적인 존재 목적 때문이다. 햇빛이 비쳐도, 구름이 껴도 괜찮던 행복한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심각해지는 지구온난화로 한때 생명에게 축복처럼 여겨지던 햇빛은 점차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했다. 물론 햇빛을 반사하기 위해 만들어낸 구름에도 온 세상을 우울하게 만든다든가 하는 나름의 부작용이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구름이 주는 막연한 공포는 결코 태풍, 홍수, 가뭄이 우리에게 주는 직격타를 넘어설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사람들은 구름을 자신의 일상 속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햇빛의 날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감사하며 온몸으로 빛살을 받아들인다.

날씨가 눈에 띄게 따뜻해졌다. 
“얘들아, 많이 졸리지? 계절이 바뀌는 때는 원래 나른한 법이야.”
오월이 되어 산뜻하게 차려입은 국어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하늘하늘한 연노랑 원피스가 창밖에 만개한 백년초 꽃 같았다.
“어서 독서 교과서 켜자. 오늘 비문학 지문 독해할 차례야. 보면 알겠지만, 우리 모두 이 지문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그래서 다 읽은 후에 간단히 토의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지?”
창가 바로 옆자리에서 세상모르고 졸고 있는 승율이를 발견한 선생님은 입을 가리고 ‘푸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고는 승율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깨운다.
“승율아 어서 일어나. 오늘 지문은 승율이가 소리 내서 읽어볼까?”
아직 잠에서 덜 깬 승율이가 허겁지겁 책상을 부팅하고 교과서를 켠다. 생각보다 긴 길이의 글에 정신이 좀 드나 보다.
“이 많은 걸 다 읽나요?”
“그럼. 소리 내서 글을 읽는 것도 시험에만 나오지 않을 뿐이지 중요한 공부야. 너희들 역사 시간에 이 내용 배운 걸로 아는데? 10년 전 선생님 학창 시절에는 학교라는 게 없고 모두 온라인 가정학습이었는데 다시 이렇게 대면 수업으로 바뀌었잖아. 그때 학교 찬성론자들이 제시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국어 말하기 능력의 발달이 늦어진다는 거였어. 실제로 조사를 해보면 선생님 또래에 사회생활 하는 사람 중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부족하거나, 회의와 토론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다른 세대에 비해 확연하게 많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희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소중한 시간에 더 많이 말하고 소통하면 좋을 것 같아. 또, 책을 소리 내 읽을 기회도 평소에는 거의 없으니까, 수업 시간에 한 번 해보자.”
승율이는 고개를 한번 절레절레 흔들어 잠을 쫓는다. 승율이의 손짓에 모니터가 두둥실 떠오르고 그것을 가볍게 쥔다.
“다른 친구들은 화면을 끄고, 오직 목소리에만 집중해 보면 좋겠다.”

<시간이 얽힌 상대적 공간도약 기술에 관하여>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질문을 던져왔다. 이를테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고정되어 있는가?’, ‘미래는 만들어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동영상처럼 이미 정해진 사건을 재생하는 존재일 뿐인가?’, ‘오늘의 이 공간과 내일의 이 공간은 서로 같은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구조를 수학적으로 기술하고자 노력하였다. 1907년 독일의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처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시공간으로 통합시키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민코프스키의 시공간은 150여 년간 물리학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나, 2058년 암흑물질의 발견으로 조금씩 수정되기 시작한다.

암흑물질은 우주에서 질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관측되지 않는 입자들에 붙은 이름이다. 이를 탐지하기 위한 전 세계의 공동연구를 통해 수백 개의 인공위성을 띄워 조사한 결과, 암흑물질은 완전히 새롭거나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물리학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표준모형의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동안 암흑물질이 관측되지 않았던 이유는 물리학자들이 기존에 암흑에너지로 부르던 매우 높은 준위의 에너지를 입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정성 원리와 마찬가지로 관측을 위해 약간의 에너지만 더 가하면 암흑물질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사라져 버렸다.

실험 물리학자들은 우주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실험 장치 속 입자가 사라지는 현상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광자나 전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부터 시작해서, 몇 년이 지나자 수백 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나노입자를 사라지게 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뮤온과 같이 빠르게 붕괴하는 불안정한 입자들은 실험 장치 속에서 사라진 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지역, 혹은 해외에 있는 연구소의 탐지기에서 붕괴 산물이 검출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때의 이동 거리는 광속에 뮤온의 수명을 곱한 값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이 실험 결과를 통해 ‘시간과 그 시간 동안 광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이동 거리는 정확히 보존된다’라는 현대 시공간 이론이 정립되었다. 사람들은 이 원리를 ‘시간이 얽힌 상대적 공간도약 (Time Entanglement Relative Teleportation)’의 약자를 따서 TERT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반감기가 1년인 어떤 방사성 동위원소 덩어리를 1광년 순간이동 시키면 그중 절반이 붕괴한 상태로 1광년 떨어진 자리에 즉시 도착할 것이다.

체계적인 이론의 토대 위에서 공학 기술은 절로 발전했다. 양자 공학자들은 입자에 가해주어야 하는 정확한 에너지 값을 계산해 원하는 만큼의 거리를 순간이동 시키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특히 크기나 질량에 상관없이 어떤 물체라도 정확히 이동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쌍둥이 과학자 이율, 이온 교수는 2097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해 우리나라 열한 번째 노벨상 수상자로 명예를 드높였다. 곧 전 세계에 순간이동 물류센터가 설치되었고, 화물기와 화물선, 화물열차를 순식간에 대체하였다. 이러한 물류 혁신은 제6차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우주 곳곳에 순간이동으로 탐사선을 보내어 시료를 채집하거나 사진을 찍는 등 우주 개발에도 큰 진전을 이루었다. 특히 탐사선들은 관측 자료를 지구로 전파를 통해 송신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대신 몸체 내에 접힌 채 내장된 순간이동 스테이션을 전개하여, 관측을 마친 후 탐사선 본체가 다시 지구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로켓을 이용해 발사할 필요도 없고, 순간이동 스테이션만 다시 내장해 주면 되므로 탐사선은 수십 번까지도 재사용할 수 있었다. 100여 년 전에는 광속보다 빠르게 정보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국소성의 원리’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TERT 이후에는 다량의 관측 데이터를 광속보다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국소성의 원리는 폐기된 낡은 이론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탐사를 통해 고래자리 타우 항성계에서 인간이 거주 가능한 행성 f를 찾아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편, 지구에서 44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엡실론, 50광년 떨어진 제단자리 뮤 등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는 항성계에 보낸 탐사선은 귀환에 실패했다. 그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전파를 송신하는 후속 탐사선도 파견하였으나, 44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응답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너무 먼 거리로 보낸 탐사선들은 도착한 즉시 작동불능 상태가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제 공학자들의 관심은 생명체를 TERT로 순간이동 시키는 과제로 옮겨갔다. 가장 먼저 바이러스를 순간이동 시켜보았더니 감염력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대장균과 효모 등을 무생물체와 같은 방법으로 이동시키면 살아서 도착하지 못했다. 생물과 무생물,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무언가는 단순히 입자의 동일한 배열에서 비롯되지 않는 것이었다. 입자들을 낱낱이 분해하지 않고 화학결합을 유지한 채 에너지를 가하여 시공간을 통과하는 기술이 개발된 후에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들의 순간이동이 가능해졌다. 파리, 쥐, 침팬지 그리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파죽지세로 성공했다. 공항과 초음속 여객 튜브가 빠르게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부지에 집이나 에너지 농장, 혹은 녹지와 같은 더 가치 있는 것들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거리마다, 건물마다 설치된 순간이동 스테이션을 이용해 세계 각지로 이동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목이 바싹 말라갔다. 승율이는 잠시 읽기를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어머 승율아, 목 아프면 물 한 모금 마시고 계속하자.”
승율이는 책상에서 얇은 호스를 뽑아 쭉 빨아 마신다. 

“데니! 또 합선됐잖아! 기판 다 태워 먹으려고 그래?”
“어쩔 수 없었어. 에이든 네가 피복을 너무 많이 벗겨서 그래. 달 기지 사고사례 72번 기억 안 나? 겨우 피복 5mm 때문에 건설이 3개월이나 지연됐잖아!”
경량 보호복을 갖춰 입고 공구를 든 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며 가상현실 헬멧을 벗었다. 온 얼굴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29번 미션 2차시도 실패입니다. 두 분 싸우지 마시고 다시 해보도록 하죠. 제한 시간 70분 엄수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트레이너의 말에 둘은 즉시 잡담을 멈추었다. 우주인은 절대 감정을 앞세우는 법이 없도록 훈련받았다. 데니와 에이든은 한두 번 땀을 닦자마자 다시 헬멧을 쓰고 공구를 쥔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128시간 연속 훈련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실제로는 이 작업을 36시간 안에 수행해야 한다는 점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각성제 캡슐 빼 드릴 테니 푹 쉬고 오세요. 자유 시간은 18시간입니다.”
스르르 각성이 풀린 둘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숙소에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의 방은 미션에서 사용할 막사와 똑같이 디자인되어 있었다. 대충 씻고 침대에 누운 둘은 피곤했지만, 아직 잠들 수는 없었다. 혈중 각성제가 수면 가능 농도 이하로 떨어지기까지는 20분 정도 남았기 때문이다.
“데니?”
“응 아직 안 자. 왜?”
“그냥 좀 떨려서. 이제 마지막 훈련만 끝나면 출발이니까.”
“에이든, 미션이 무서운 거야? 우리 그동안 충분히 연습했잖아. 게다가 타우 Ceti-f는 달보다도 훨씬 안전할 거야. 숨 쉴 수 있는 공기, 깨끗한 물, 게다가 인간을 숙주로 하는 병원체도 없고.”
“그래 나도 알아. 근데 그것 말고. 난 멀리 순간이동 하는 게 좀 꺼림직해서 그래.”
“또 쥐들이 도착하지 못했다고 말하려고? 대신 개와 침팬지, 심지어 고래까지 잘 도착해서 살고 있다니까.” 
“개는 힘없이 비실댄다면서. 침팬지도 좀 늙어 보이고.”
“에이든. 넌 너무 걱정이 많아. 순간이동 장치는 이미 세계인 누구나 쓰고 있잖아. 아주 안전하다고. 우리 미션과 비슷한 방법으로 달과 화성, 이오도 이미 성공적으로 개척했고. 또 여차하면 지구로 다시 돌아오면 돼. 그냥 3일 후에 화성으로 여행 간다고 생각하고 맘 편하게 먹으라고.”

숙소 천장은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데다가 낭만적이기까지 한 천문학자들은 타우 Ceti-f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모습을 궁금해했다. 숙소와는 다르게 실제 막사 천장에는 고급 천문 관측장비들이 달릴 것이다. 물론 겨우 10광년 차이로 별자리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사막 한가운데 우주 센터의 공기는 고요했다. 밤하늘엔 고래자리와 오리온자리가 나란히 흘러가고 있었다. 데니는 문득 오리온자리의 웅장함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삼태성 그리고 거인의 커다란 어깨를 닮은 별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보호복을 입은 두 사람은 스테이션 앞에 섰고 기자들은 그 모습을 찍느라 바빴다. 
“외계 행성에 처음으로 거주하는 사람으로 기록될 예정인데 소감은 어떠신가요?”
“타우 Ceti-f에 도착하면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기자들이 우주인의 임무를 충분히 이해한 뒤 취재 오길 바랐던 데니의 바램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와중 모든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고 있는 에이든이 못마땅해 보이기도 했다. 잠시 후 기자들이 조용해지자, 둘은 후발대 30명과 인사를 나눴다. 데니와 에이든이 막사를 짓고, 물 정화 시설과 에너지 농장을 조립해 생존에 필수적인 시설을 구축하면 후발대가 도착해 본격적으로 지형 탐사와 개척을 시작할 예정이다. 그들은 악수하고 끌어안으며 데니와 에이든의 임무 성공을 기원했다.
“3일 후에 먼 타지에서 봅시다. 여러분을 위해서 꼭 성공하겠습니다.”
에이든이 마지막 인사를 간단히 끝냈다. 기자들이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은 스테이션에 들어갔다.
“작동 준비 완료. 목적지는 타우 Ceti-f의 개척지에 위치한 1번 스테이션입니다.” 
보호복에 장착된 이어폰으로 스테이션의 기계음이 들려왔다.
“자 그럼 고래자리로 가보자고!”
데니가 버튼을 눌렀다. 둘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스테이션 외부 화면에 ‘출발 성공’이라는 글씨만 남았다.
“둘은 이미 고래자리 타우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이 땅을 인류가 정복했음을 상징하는 인류기를 꽂은 후 곧 막사를 조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첫 번째 일지와 영상은 약 한 시간 후 메모리 칩에 담아 보내올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주 센터 대변인이 단상에 서서 발표했다. 기자들은 웅성대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눈앞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컨테이너들이 보이고, 그 뒤로 황무지와 바위산이 펼쳐졌다. 군데군데 외계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었다. 왼쪽으로는 파도가 없어 이질적이지만 지구와 같이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데니는 서둘러 스테이션에서 발을 뻗어 퍽 하고 맨땅을 밟았다. 인류가 외계 행성에 첫발을 내딛는 큰 도약의 순간이었다. 데니가 에이든을 향해 뒤돌아섰다.
“드디어 도착했… 에이든?”
에이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의 보호복만이 서 있었다. 그 순간 보호복의 무릎이 땅에 닿고, 상체와 헬멧은 뒤로 젖혀져 힘없이 쓰러졌다. 두 대원 모두가 도착하지 못하면 규정상 임무를 즉시 취소해야 했다. 데니의 이성은 산산이 부서졌다. Ceti-f는 안전한 기회의 땅에서 순식간에 두려움과 죽음의 망망대해로 변했다. 발붙일 지각 외에는 심우주와 다름없는 이곳에서 데니는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그는 스테이션의 외부 패널에서 메모리칩을 뽑고, CCTV를 힘으로 잡아뜯어 공구함에 넣었다. 그리고 스테이션에 들어가 목적지를 ‘최근 출발지’로 지정했다. 작동 준비를 알리는 기계음이 들리는 것도 무시한 채 데니는 버튼을 빠르게 연타했다. 모든 일은 단 몇 초 만에 이루어졌다.

모두가 동시에 데니를 쳐다보며 깜짝 놀랐다. 기자들이 다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데니는 스테이션 내벽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와중, 데니는 현실감을 상실하고 패닉에 빠져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50대 중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됐으면 다시 읽기 시작하렴.”
승율이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호스를 손에서 놓는다. 호스는 춤추는 뱀처럼 책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2128년에 발생한 데니-에이든 외계 행성 탐사 실패사건으로 인해 세계인들은 순간이동 스테이션의 안전성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데니의 신체나이를 정밀하게 측정한 결과 약 20년 늙었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을 뿐, 노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또한 타우 Ceti-f에 도착해 있던 개와 침팬지를 로봇으로 포획하여 지구로 데려오는 실험을 진행하였으나, 이들도 에이든처럼 지구에 도착하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이 결과는 수많은 논쟁을 낳으며 과학자들을 분열시켰다. 특히 일부 과학자들이 ‘시공간은 생명체의 수명, 즉 운명과도 얽혀 있으며, 생명체는 그에게 예정된 수명 이상의 거리를 순간이동 하지 못하고 도중에 소멸한다’라는 가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른바 ‘운명 가설’이라고 불리는 이 이론은 ‘운명’이라는 비과학적인 요소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주류 과학계로부터 배척당했다.

그러나 점차 운명 가설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들이 발표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제로스 교수 연구팀의 쥐 실험이다. 생물학자인 제로스 교수는 평균수명이 2년에 오차 범위 7일로 정밀하게 유전자를 조작한 이른바 ‘시한폭탄 실험쥐’를 개발했다. 그리고 여러 마리의 실험쥐를 지구에서 2광년 떨어진 순간이동 스테이션으로 보내는 간단한 실험을 하였다. 결과는 운명 가설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출발한 쥐의 절반은 스테이션에 도착하지 못했으며, 도착한 쥐들은 모두 노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었고 가장 오래 버틴 개체도 7일 이내에 죽었다. 이 공로로 그해 노벨 생리의학상이 제로스 교수에게 수여되자 학계는 발칵 뒤집혔고 운명 가설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2137년 미국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하나-알파 참사1)도 운명 가설을 지지하는 간접 증거가 되었다.

“선생님, 여기 달린 주석도 읽을까요?”
승율이가 간만에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뻑뻑한 눈을 길게 감았다 뜬 승율이는 주석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다.

1) 미국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주를 덮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 하나-알파로 인해 21만 4천여 명이 사망하고 5천만여 명의 이재민과 127조 달러의 재산 피해를 낸 사건이다. 기후 위기 대응에 소극적이었던 미국 정부는 역대 최악의 자연재해를 맞이한 후에 급격히 환경정책을 전환했다. 대표적으로는 미국 내 전력 소비량의 30%를 태양광 발전 인공위성으로 대체하고, 인공 구름 프로젝트를 주도하여 전 세계적으로 실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거리 순간이동에 의해 첫 번째로 희생된 사람인 에이든의 거주지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였으며, 만약 그가 탐사대로 선발되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 연구원으로 계속 일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참사 당시 마이애미는 완전히 침수되었고 에이든의 가족과 친구, 이웃들 모두가 사망하였다. 당연히 에이든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함께 사망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그의 운명은 2137년까지였던 것이다. 이는 순간이동 9년 이후의 시점이기 때문에 10광년을 이동하고자 시도했던 그의 소멸은 운명 가설을 뒷받침해 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운명 가설은 점차 정설로 자리 잡았고, 이는 우주 탐사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도착만 했을 뿐인데 탐사대원이 나이가 들어 신체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점이었다. 일부는 건강한 십 대 청소년을 훈련시켜 탐사를 보내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에이든의 사례에서 보았듯 운명은 우리의 바람대로 순순히 작동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제아무리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살아서 도착한다고 해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 소중한 10년, 왕복 순간이동이라면 20년의 시간을 베어내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엄격한 선발 과정을 통해 우주인 자격을 갖춘 사람 중 타우 Ceti-f를 다시 탐사하는 미션에 자원한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분위기는 테로사 교수 연구팀의 dTERT 기술 개발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내 지도교수인 테로사는 한때 촉망받는 연구자였기에, 서른하나라는 젊은 나이에 우리 학교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다. 나와 네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 언니 같은 분이다. 그러나 부임 후에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신생 랩의 단점을 알고도 지원했으니 내 연구가 잘 풀리지 않는 데에는 당연히 내 탓이 크다. 열심히 하시는 우리 교수님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욕한담. 아무튼 우리 랩은 전 세계에 수백 개도 넘는, 암 진단을 연구하는 그저 그런 곳이다. 초기 단계의 암은 약물로 정복된 지 오래다. 다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암을 약물 투약 적기보다 늦게 발견한다. 그래서 학계의 관심은 암 조기진단에 몰려있는 것이고 우리처럼 별다른 성과가 없는 실험실도 연구비 조달이 별 탈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그저 유행에 잘 편승했달까.
내가 맡은 일은 소량의 혈액에서 TERT (TElomerase Reverse Transcriptase, 텔로머레이스 역전사효소)의 활성을 측정해 초기 암의 종류를 구별하는 바이오센서를 개발하는 과제이다. 손끝을 바늘로 찔러 나온 피 한 방울을 센서에 묻히면 암 종류를 구분하고 심지어 미래에 걸릴 암을 예측할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은 기술이다. 물론 연구계획서에서만 그렇다. 실제로는 주사기 한 통에 가득 찬 피를 가지고도 양성 종양과 악성 종양을 구분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평균 이하 과학자의 길을 걷는 줄 알았던 나와 테로사 교수의 인생 역전은 어느 날 찾아온 사소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췌장암 마우스가 케이지에서 탈출했어!”
우연히 연구실에 방문한 교수님이 발견해 소리치지 않았으면 한참을 모를 뻔했다. 아차, 방금 작업을 빠르게 하려고 케이지를 열어둔 게 화근이었구나. 나는 들고 있던 피펫을 던져놓고 교수님과 함께 쥐를 뒤쫓기 시작했다. 쥐는 살짝 열린 실험실 문틈을 통과해 사무실로 들어갔다. 교수님은 복도 쪽 문을, 나는 실험실 쪽 문을 닫아 사무실 안에 쥐를 가두는 데 성공했다. 사무실 안 동료들은 모두 논문을 쓰고 있었다. 손에 라텍스 장갑을 끼고 소독을 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즉 이 쥐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뜻이었다. 쥐는 좁은 통로를 돌며 도망 다니던 중 택배용 순간이동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갔다. 그 옆자리에 앉은 동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을 닫아 쥐를 포획했다. 쥐가 포기한 듯 제자리에서 숨을 헐떡대자, 나는 스테이션 문을 열고 쥐를 꺼내려고 했다. 그 순간 교수님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우리, 얘 순간이동 시켰다가 다시 불러올까? 인공 췌장암은 수명 1년 6개월이지? 한 1광년쯤 어때?”
택배용 스테이션에는 물체를 원하는 곳으로 보냈다가 다시 우리 스테이션으로 회수해 올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이 제안을 듣고 재밌겠다 싶었다. 내 눈에서 동의를 읽은 교수님은 즉시 패널을 조작해 심우주에 퍼져 있는 스테이션들의 목록을 검색했다. 0.5광년에 가장 가까운 ‘큰곰자리 프사이 방향 0.57 광년’ 스테이션을 선택하고는, 송신과 수신 버튼을 순서대로 눌러 쥐를 순간이동 시켰다가 되돌려 놓았다. 순식간에 쥐의 1.14년을 빼앗았다.

“자 이제 얘 혈액 샘플 뽑아서 노화 측정기에 넣어봐. 아, 췌장암에 맞춰서 레퍼런스 만들어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 써. 표준 마우스랑 비교하면 오차 좀 나더라.”
대학원생이 교수님의 명령을 의심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지시대로 했다. 그러나 이 측정이 과학사를 영원히 바꿔놓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태어난 지 4개월 된 이 쥐는 약 1년 1개월 2주 정도를 순간이동했기 때문에 거의 죽을 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노화 측정기는 이 쥐가 4개월짜리 젊은 쥐라는 사실과 그 증거가 되는 호르몬 수치들을 화면에 연달아 띄우고 있었다. 운명을 거스른 첫 번째 생명체가 세상과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실험실 동료들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과학적 흥분에 사로잡혀 소리치며 날뛰었다.
무엇이 췌장암 쥐를 이렇게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이 쥐가 태어나자마자 암에 걸리게 하도록 돌연변이를 일으킨 예닐곱 개의 유전자들이 있다. 이들의 역할만 살펴보면 됐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몇 번의 추가 실험 만에 나는 당당히 교수님께 이렇게 보고드릴 수 있었다.
“운명 가설 말이에요, 그거 피하는 방법은 간단했어요. 당연하게도 답은 텔로미어에요. TERT는 말 그대로 두 얼굴의 천사예요. 암을 발생시킨다는 단점이 있지만, 노화를 막아준다는 엄청난 장점도 공존하죠. 아마 TERT 활성이 극도로 높으면 순간이동을 하는 도중에 노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가 논문을 발표하자마자 전 세계에서 공동연구 제의가 쏟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제약사와의 협업을 통해 TERT 순간 활성을 극도로 높이면서도 암에는 걸리지 않는 주사제와 먹는 약 개발에 성공하였다. 또한, 감사하게도 우리 학교 양자공학과와 생명공학과 전체가 이 한 분야에만 전력을 다해 주었다. 거대한 협업의 결과, 순간이동을 위해 에너지를 가하는 단계에서 전기화학적 방법으로 TERT 활성을 증강하는 완전히 새로운 스테이션도 개발하였다. 수 광년을 왕복한 개와 고양이, 심지어 침팬지 모두 늙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의 리더였던 테로사 교수님의 노벨상 수상은 너무나도 확실해졌다. 물리학상을 받을지 아니면 생리의학상을 받을지 행복한 예측이 이어졌다. 

만약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성공한다면 말이다.

“TERT 활성을 높이면서 TERT를 하는 double TERT, 이른바 dTERT에 대한 이론 설명은 여기서 마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dTERT 장치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수백 명의 전문가가 지켜보시는 앞에서 공개 실험을 하려니 정말 떨리네요.”
며칠 전 교수님께서는 자기가 직접 dTERT로 타우 Ceti-f를 다녀와 우리 기술을 증명하겠다고 말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실험에서 젊은 피험자를 구하고 인간실험윤리 절차를 따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노벨상 때문이었다. 지금이 9월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당장 인간의 dTERT 성공이라는 업적을 달성하고 10월에 노벨상을 바로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시간이 없었고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리프트에 실린 순간이동 스테이션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네모반듯하게 깎인 번쩍이는 금속 장치에서 현대 기술력의 위압감이 몰려온다. 교수님은 카메라 안경을 쓰고 그 앞에 섰다.
“20년 전 인류가 운명이라는 벽 앞에 무릎을 꿇은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운명마저도 거스르는 과학의 힘이란 무엇인지를 온 세상에 보여주려 합니다.”
무대 조명과 플래시 세례가 교수님에게 쏟아졌다. 교수님은 특유의 쇼맨십으로 사람들에게 찡긋해 보인 뒤, 버튼을 눌러 순간이동 했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속에서 스테이션 외부 화면에 ‘출발 성공’이라는 글씨만 깜빡였다. 그러나 떨리는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교수님이 나타나서는 ‘에이든’이라고 적힌 헬멧을 높이 들어 보였다. 안경은 무대 화면과 즉시 동기화되어 타우 Ceti-f 표면에 교수님이 인류기를 꽂는 영상이 상영됐다. 장내는 일순간에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모두가 방방 뛰며 서로를 얼싸안고 함성을 질렀다. 행사장 측에서 준비한 건지 축포도 터졌다. 그렇게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교수님은 밝게 웃어 보였다.

우주에 대항한 인간승리의 아이콘이 된 교수님은 그 어떤 반론의 여지 없이 다음 달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승리에 도취한 우리 연구팀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환상적인 나날을 보냈다. 교수님은 유명인사가 되어 거의 매일 강연 일정이 잡혔다. 한 통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안녕하세요. 실험동물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인턴 혜민이라고 합니다. 테로사 교수님 맞으시죠? 제가 dTERT 실험에 쓰였던 동물들의 예후를 관찰하고 있는데요, 음... 처음엔 마우스가 죽었습니다. 뭐 이건 자주 있는 일이니까 제가 관리를 못 해서 그랬거니 했는데요. 오늘은 침팬지가 죽어서 연락드려요. 직접 와서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와 테로사 교수님은 당장 다음 일정을 취소하고 혜민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마우스랑 침팬지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의 모습이 완전히 같았어요.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쓰러져서는, 마치 질소에 질식하는 것처럼 1분 안에 의식을 잃고 평온하게 죽었어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매일 하는 검사에서 이상징후는 전혀 없었습니다.” 
“혜민 양, 제로스 교수의 시한폭탄 쥐 그거 우리 센터에도 있나요?”
교수님이 창백해진 얼굴로, 감정의 동요를 숨기며 말했다.
“네 오늘 태어난 개체는 18마리 있습니다. 6개월령은 21마리 있고요.”
“6개월령 쓸게요. 그거 전부 우리 실험실로 인계해줘요.”

왜 아무도 이 생각을 못 했던 걸까. dTERT로 제로스 교수의 실험을 똑같이 시행한 결과 6개월을 살고 1.5광년을 다녀온 시한폭탄 쥐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9마리는 도착하지 못했고, 12마리는 도착 직후 6개월의 신체 나이로 돌연사했다. dTERT 기술은 구원인 동시에 파멸이었다. 역설적으로 나이를 먹지 않았기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운명은 dTERT 사용자를 턱밑까지 더욱 옥죄었다. 어쩌면 인간에게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았던 기술이요, 탐내지 말았어야 할 선악과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교수님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다 잠이 오지 않는다며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몇 주 후에는 마약성 항우울제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강연하던 도중 말을 잃고 허공만 바라보거나, 일정을 취소하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우는 날이 늘어만 갔다. 결국 사라진 20년의 압박감을 견뎌내기 위해 교수님은 남은 시간까지 지우길 선택했다.
어느 날,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교수님은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다가갔다.
“교수님 그 총 어디서 났어요?”
“아 세라 양. 너희들에게 할 얘기는 여기에 다 써놨어. 그래 그동안 고마웠고 또…. 혼자 조용히 끝내고 싶어. 추한 모습 보이기 싫으니까 그만 나가봐.”
“교수님 미쳤어요? 이렇게 죽는 게 어딨어요!”
나는 총을 뺏으려고 뛰어가 몸을 던졌다. 교수님이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깔려 쓰러졌다. 총알 한 발이 천장으로 발사됐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너야말로 미쳤어? 이거 장전돼있었어! 같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거야?”
나는 교수님의 손에 쥐어진 총을 장전하고, 한껏 화난 표정을 지으며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그러고는 총열을 끌어당겨 총구를 내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내가 죽는 게 싫으면 당신도 죽지 마.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 할 거 아냐. 그깟 20년 좀 없으면 뭐 어때!”
나는 교수님 얼굴을 앞에다 대고 침을 튀기며 빽빽 소리를 질렀다. 거친 숨과 폭발할 듯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교수님도 나에게서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솔직히 두려웠다.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순간이었다. 교수님은 파르르 떨며 이렇게 얘기했다. 입술이 힘겹게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 운명은… 그… 그… 그렇게 작동하는 게…… 아냐.”
마지막 거친 숨과 함께 일순간 교수님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탕 하는 금속 파열음을 내며 총도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코와 입이 순식간에 굳어 다음 숨을 내뱉지 않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실험쥐에게서 봤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최후였다.
한때 자연을 사랑하는 과학자였고, 또 잠시 자연을 이겨보려 했으나 결국 자연의 위력을 꺾을 수 없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간 테로사 교수, 잊을 수 없는 정말 그녀다운 마지막이었다.

운명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혀졌지만, 적어도 노화는 방지할 수 있는 이 기술 덕분에 타우 Ceti-f 탐사가 재개되었다. 학계에서부터 길거리 시위대까지 윤리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수십 명의 자원자가 행성을 개척하고, 수만 명의 자원자가 그곳으로 이주해갔다. 일부 탐험가들은 세 번째 행성을 찾아 나섰지만, 우리의 수명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는 타우 Ceti-f 외에 인간이 거주할 만한 외계 행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자 타우 Ceti-f로도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르센 교수팀의 냉동인간 순간이동 계획이다. 만약 인류가 전 지구적인 재난을 모두 회피하여 수십억 년 이상 더 생존한다면, 그리고 오늘날 냉동한 사람들을 그때 깨워 미래의 의학 기술로 치료한다면, 그의 운명은 매우 긴 것이기 때문에 수십억 년을 순간이동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센 교수팀은 이 실험을 일 년 안에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끝까지 읽은 승율이가 숨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수고했어 승율아. 자 그럼 남은 시간 동안 간단한 토의를 하고 마치도록 하자. 너희들 과학 시간에 슈뢰딩거의 로봇 고양이 실험은 했니?”
“그때 저희 조는 로봇 고양이가 없어서 로봇 청소기로 하긴 했어요.”
아이들이 일제히 깔깔거린다. 무슨 재밌는 일이 있었나 보다.
“저희 반은 반감기가 40분인 동위원소를 사용했는데요, 40분 후에 로봇 4대 중에서 정말로 2대가 고장 났어요. 진짜 신기했어요!”
“그래 결과가 잘 나왔구나. 혹시 과학 교과서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기억나는 사람 있니?”
반에서 가장 모범생인 우현이가 손을 들고 이야기한다.
“네. 고전 양자역학은 모든 것은 확률적이므로 로봇이 고장 난 상태와 멀쩡한 상태가 50%씩 중첩되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것은 운명적이므로 고장 난 로봇은 처음부터 고장 날 운명이었고, 그것을 미리 관측할 방법은 40광분을 순간이동 시켜보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설명합니다.”
“잘 얘기해줬어! 우현아. 요즘 철학자들은 세상이 모두 미리 정해져 있고 우리는 모두 동영상 속 인물들처럼 운명을 재생할 뿐이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너무 우울하지 않니? 난 냉동인간 순간이동 실험이야말로 운명을 넘어서는 데 가장 가까운 행동이라고 생각해. 이 교과서가 작년에 출판돼서 일 년이라고 쓰여있는데, 다들 뉴스 봤지? 이틀 전에 첫 실험이 진행됐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냉동 캡슐에 들어가기 직전에 순간이동을 시작했대.”
“스테이션 대신 새로 개발된 전신 순간이동 슈트를 입었다고 봤어요.”
“맞아. 그래서 매번 자기가 원하는 방향, 원하는 거리만큼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됐을 것 같니?”
아이들이 잠시 고민에 빠진다. 한아가 빼꼼 손을 들고 입을 뗀다.
“저라면 적어도 지구로는 안 돌아올 것 같아요. 일단 거리에 상관없이 순간이동을 한 번 성공하면 불치병이나 냉동 그 자체 때문에 ‘당장’ 죽지는 않는다는 소리잖아요. 그 뒤로는 자기가 얼마나 오래 냉동되어 있을지 모르니까…. 한 번 한 번의 순간이동 기회가 소중할 것 같아요. 다음번 이동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수도 있잖아요. 수명을 깎아 지구로 돌아오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먼 우주를 보고 싶을 것 같아요.”
“한아야 아주 좋은 의견이야. 사실 선생님도 똑같이 생각했어. 실제로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 그가 지구로 돌아오지는 않았지.”
준형이도 손을 들고 얘기한다.
“선생님 질문이 있어요. 만약 미래의 모든 사람이 세대를 걸쳐 약속해서, 그를 냉동에서 깨우고 불치병을 치료할 의료 기술이 개발된 후에도 일부러 계속 냉동시켜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요. 그러면 수명이 무한해질 수 있을까요?”

과연 미래 인류가 그의 137억 년을 지켜 주었을까? 어쩌면 그는 이미 우주배경복사 너머의 세상을 눈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 외엔 그 금단의 지평선 너머 풍경도 평범하겠지만 말이다. 한 인간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구에 남은 우리 중 아무도 배경복사 밖의 모습을 모르더라도 괜찮다. 사실 그 자체는 유일하고 또 영원하므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단 한 사람만이 안다고 해서 그것을 거짓이라거나 없는 정보로 취급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이다.

배경복사 너머에도 차가운 전파가 아니라 따뜻한 가시광선이 흐를 것이다. 아마 먼 우주가 태양계 근처와 놀랄 만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종이 치며 수업이 끝났다. 기압이 더 올랐는지 이제 흰 구름은 한 점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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