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예원 기자
©오예원 기자

 2018년 2월 <뉴욕타임즈>에는  ‘포스트 텍스트 미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Post-Text Future)’ 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디지털 사회가 도래한 지금,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만큼 텍스트가 쇠퇴하고 오디오, 비디오의 파급력과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텍스트를 독해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요즘 젊은 세대의 어휘력을 문제 삼는다. 오늘을 뜻하는  ‘금일’ 을 금요일로 이해하거나,  ‘사흘’ ,   ‘나흘’   이 각각 며칠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매체가 다양화되고, 미디어 생태계가 복잡해지는 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개인에게 영향을 주고, 사회의 흐름을 변화시킨다. 이번 기사에서는 디지털 혹은 뉴미디어 시대로 불리는 변화에 따라 새롭게 대두되는    ‘리터러시(Literacy)*’ 의 문제에 대해 다룬다. 과연 요즘 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좋지 못한 리터러시를 가졌는지, 정보와 텍스트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해야 하는지 논하고자 한다.  

‘심심한 사과’ 와  ‘실질 문맹률 75%’ 

 최근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우리 사회에 문해력 논란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한(甚深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루하거나 재미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기사에서 이 논란의 배경을 설명한 후 기본적인 단어를 모르는 요즘 젊은 층의 어휘력을 문제 삼았다. “요즘 애들 문해력이 문제다”, “한자교육을 다시 강화해야 하고 책을 많이 읽혀야 한다”는 등의 댓글이 이어졌다. 이러한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3일간 이어진 연휴를 사흘 연휴라고 표현한 것에 “3일인데 왜 사흘이라고 하냐”는 등의 반응도 논란이 되었고, 고지식을 지식이 높다는 뜻으로 이해하더라는 일화도 ‘요즘 애들의 문해력 문제’를 도마 위에 오르게 했다. 이러한 논란이 대두될 때마다 매체에서는 ‘실질 문맹률 75%’라는 수치가 인용되곤 한다. 2004년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표한 교육인적자원지표에 따른 수치인데, 이 지표는 대한민국 성인의 문해력이 OECD 최하위 수준이며 문서를 보고도 읽고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인구가 성인의 75%라는 충격적인 숫자이다. 하지만 이는 문서 문해력, 산문 문해력, 수리 문해력 세가지 분야중 문서 문해력만 발췌하여 집계한 수치일 뿐만 아니라, 4단계로 나누어진 문해력 수준 중 낮은 두 단계의 비율을 임의로 합하여 산출한 숫자임이 밝혀졌다. 그뿐 아니라 2020년 새롭게 조사가 시행되었음에도 20년 가까이 왜곡되고 오래된 통계가 활용되고 있던 것이다.

 ‘심심한 사과’와 ‘실질 문맹률 75%’. 두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리터러시는 단순히 어휘를 이해하는가의 여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휘력 부족을 지적하려 한 기사조차도 잘못된 통계를 근거로 삼는 모습은 우리에게 리터러시 부족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한자로 된 어휘를 이해하는 것은 리터러시의 작은 부분에 불과할 수 있다. 리터러시는 단지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 교육학의 대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리터러시를 정의할 때 ‘단어 읽기와 세상 읽기(Reading the word and reading the world)’라는 대구적 표현을 썼다. 글을 읽는 일은 수단으로써 세상을 이해하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초에 56만 GB의 정보가 생성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리터러시를 다양한 방면에서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리터러시 이해하기 : 인터넷과 스마트폰

 인터넷은 컴퓨터 공학자 테드 넬슨(Theodore Nelson)이 제시한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의 개념에 의해 무한한 공간이 되었다. 이 말들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인 텍스트와 미디어라는 개념에 초과, 초월의 뜻을 가진 접두사 ‘hyper-’가 붙어있다. 즉 하이퍼텍스트란 텍스트 너머에 또 다른 텍스트 혹은 다른 개체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컴퓨터 화면에서 특정 텍스트를 클릭하면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 새로운 텍스트를 보여주듯 말이다. 경계가 사라져 새로운 확장 가능성을 지닌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공간 안에서 우리는 공적이거나 사적인 미디어, 또는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새로운 미디어들을 접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사람들이 의사소통하는 풍경이 많이 변화했고 어떻게 읽고, 쓰고, 대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인터넷의 발전은 우리에게 인터넷이라는 세상에서 제대로 읽고 써야 한다는 숙제와 함께 인터넷이라는 세상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해야 한다는 숙제를 동시에 쥐여준 셈이다. 

 2007년 아이폰이 세상에 처음 출시되고, 우리는 또 한 번 새로운 종류의 리터러시 혁명을 목격했다.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는 2015년 ‘스마트폰은 어디에나 있고, 중독성이 있으며, 항상 변한다’는 부제와 함께 ‘휴대전화들의 행성(Planet of the phones)’라는 표지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는 신조어도 등장한다. 원래 휴대전화라는 물건은 멀리 있는 사람과 간편하게 말소리로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휴대전화가 똑똑해짐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그것으로 읽고 쓰는 일도 하기 시작했다. 작은 화면에 문서를 펼쳐서 읽고 웹사이트에서 뉴스를 읽고, 듣고, 보기도 한다. 사진을 주고받고 본인이 찍은 사진을 게시하기도 한다. 게시물이 재미있으면 공유도 하고 댓글을 읽고 새로운 댓글을 달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가 리터러시를 실천할 공간은 종이와 연필, 책과 도서관에서부터 시작해 인터넷과 스마트폰, 영상과 오디오로 더욱 넓게 펼쳐졌으며, 온·오프라인을 가로질러 다양한 유형의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단어와 세상을 더 잘 읽으려면

 텍스트를 읽는 것은 분명 디지털 시대에도 그 중요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영상 매체, 음성 매체 또한 결국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 잘 읽을 수 있을까. 우선 ‘지식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글은 누가 쓴 것이며 어떤 근거를 들어 주장하고 있는지, 다른 자료는 어떻게 이야기하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는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맥락에 대한 지식’도 리터러시 향상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시험 위주의 교육으로 인해 글을 읽는 행위 자체를 공부나 숙제로 지나치게 무겁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흥미로운 소설책이었을 문학작품도 등장인물의 성격과 기분을 파악하며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가볍게 모험하듯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있다. 유튜브에서 좋아하는 영상을 찾듯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텍스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오히려 책을 꼭 끝까지 읽어야 한다거나 완벽하게 읽어야 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책의 서문만 읽을 수도 있고 목차를 보고 흥미로운 장만 골라 읽을 수도 있다. 최근 한 연구에서 리터러시를 평가하는 척도로 글을 건너 뛰며 읽는 능력을 포함시킨 경우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리터러시를 향상하려면 글을 대충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리터러시

 우리는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며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들을 활용하여 일을 하기에 리터러시는 개인의 성장과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배움의 도구이다. 하지만 리터러시의 효용은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의 소통과도 관련이 깊다. 우리는 읽고 생각하고 나누며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를 협력적으로 파악하고 해결해왔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함께 읽고 생각하는 경험을 통해 인류 문명사의 수많은 변화와 진보를 이끌어 왔고, 반대로 잘못 읽고 나쁘게 써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시대적 퇴행을 겪기도 했다. 디지털 사회로의 변화는 새로운 기회와 거대한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동시에, 우리는 그로 인해 출처를 밝히지 않는 저급 정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뉴스가 유통되는 가운데 살아야 한다. 정치와 여론의 왜곡, 날조가 일상이 되었고 이는 어쩌면 날로 진화하는 바이러스보다 더 큰 영향을 인류에 미칠지도 모른다. 우리가 먼저 나서 세계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잘 읽고, 잘 이해하고, 잘 대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리터러시(Literacy)*
문해력으로 자주 번역되며 글을 읽고, 그에 담긴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리터러시는 탈문맹(脫文盲), 문식성(文識性) 등 다양한 언어학 용어들을 포괄하는 말로 온전한 의미 전달을 위해 본 기사에서는 리터러시라는 말을 그대로 쓴다. 

참고문헌 |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 조병영, 쌤앤파커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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