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예원 기자
©오예원 기자

 여기 소피라는 아홉 살 소녀가 있습니다. 소피는 1년 넘게 죽은 듯한 무반응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움직이거나 대화를 할 수 없음은 물론 눈도 뜨지 못했죠. 소피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소피에게는 어떠한 의학적인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소피의 뇌는 건강했고, 혼수상태에 빠져있지도 않았습니다. 실질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소피는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줄곧 깨어나지 못한 채로 말이죠. 언뜻 보면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소피의 병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소피는 왜 깨어나지 않는 걸까요?

 

스웨덴의 체념증후군 아이들

 놀랍게도 소피만 이처럼 불가사의한 의식 불명을 겪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5년과 2016년 사이에 스웨덴의 여러 도시에서 169명의 아이들이 소피처럼 잠들었고, 다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증상은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불안과 우울 증세를 보이다가, 점차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않게 되었고, 곧이어 노는 일 자체를 그만두었습니다. 말수가 줄어들다가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종국에는 잠들기에 이르렀죠. 증상이 더 심해질 경우 먹거나 눈을 뜨지 못하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의학적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죠.

 아이들은 운이 좋으면 몇 달 만에 깨어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수년 이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전례 없는 상황을 설명할 용어를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마침내 스웨덴어로 ‘포기하다’라는 의미인 ‘업기븐헷신드롬(Uppgivenhetssyndrom)’이 공식 용어로 채택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체념증후군이라고 불립니다.

 체념증후군의 원인은 수수께끼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환자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웨덴으로 망명하고 싶어하는 가족의 자녀들에게 주로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체념증후군을 겪는 아이들은 망명 전부터 정신적인 외상을 입어 오다가, 망명 신청이 거부되면서 체념증후군을 앓게 됩니다. 이렇게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질환을 심인성 장애라고 합니다. 체념증후군도 심인성 장애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소피처럼 뇌에 병이 없는데도 의식을 잃는 증상은 ‘해리(dissociation)’라는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심인성 장애는 분명히 질병에 포함되지만, 생물학적 측면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망명 신청 과정에서 아이들이 보인 반응은 단순히 생물학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망명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스웨덴이라는 환경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체념증후군은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이 사회에 목소리를 전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체념증후군의 발달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외부 요인이 아이들의 뇌에 영향을 준 방식입니다. 따라서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을 살펴보는 일은 때로 심리•생물학적 요소들을 파악하는 일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질병과 환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환자들이 어디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파악할 수 있게 돕기 때문입니다.

 체념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은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장애의 정도에 따라 서서히 깨어납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경험할 시간의 간극을 해결해 줄 방법은 여전히 요원합니다. 우리가 질병의 사회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미스키토인들과 그리지시크니스

 니카라과공화국의 모스키토 해안에 거주하는 미스키토인 공동체에 발병한 그리지시크니스(grisi siknis)는 독특한 심인성 장애의 또 다른 사례입니다. 그리지시크니스는 ‘크레이지 시크니스(crazy sickness)’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정신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의 유래와는 달리, 미스키토인 공동체에서 그리지시크니스는 터부시되는 질환이 아닙니다.

 그리지시크니스에 걸린 사람들은 처음에는 두통이나 피로감, 현기증처럼 그다지 해롭지 않은 증상을 보입니다. 그러다 병이 심해지면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거나 경련, 혹은 호흡 곤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지시크니스의 가장 큰 특징은 환각 증세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환각을 목격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레프러콘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타고 나타나는 악마의 모습으로 말이죠. 그러면 환자들은 불안해하며 공격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환각의 종류는 각기 다르지만, 미스키토인들은 그리지시크니스의 환각 증세가 악마에 의해 생겼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마에 의해 병에 걸렸다고 믿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환자들이 부정하다고 낙인찍지 않는 것이죠. 나름의 치료법도 있습니다. 환자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감금한 뒤, ‘플로리다수’라는 액체를 환자들에게 부어 영혼을 정화하는 겁니다. 그러면 환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완전히 회복됩니다.

 심리적인 고통이나 갈등은 신체적인 증상으로 경험하고 외면화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현대 서구의학의 시선으로는 다소 미신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질병 역시 미스키토인 공동체에서 심리적인 고통과 갈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왜 니카라과에서는 그리지시크니스이고, 스웨덴에서는 체념증후군일까요?

 질병은 사람들이 흔히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패턴화된 행동입니다. 건강함의 기준부터 신체 변화를 대하는 태도, 치료 방법까지 모두 집단에 따라 다릅니다. 문화는 신체 변화에 대한 반응만이 아니라, 고통을 표현하고 도움을 요청할 가장 최적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질병의 형태로 표현된 고통은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까운 이들에게 알리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미스키토인들은 그리지시크니스를 통해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인 갈등을 표현합니다. 즉, 질병은 때로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범위에서 고통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미국 외교관들의 아바나증후군

 심인성 장애에서 사회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체감했다면, 이제 새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신체적인 질병에 진단을 내리기도 어려운데, 심인성 장애라는 진단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2017년 8월, CBS 뉴스는 쿠바의 아바나 지방에 있는 미국 국무부 직원들이 원인 불명의 의료 문제를 겪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쿠바에 파견된 미국 외교관들이 두통이나 청각장애, 현기증, 이명, 집중력 저하 등 일련의 증상들을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뇌 손상 병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공통으로 증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상한 소음을 들었다고 보고했죠. 언론에서는 외교관들에게 바이러스나 초음파를 이용해 음파 공격이 의심된다는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결국 이 현상은 ‘아바나증후군(Havana syndrome)’이라는 새로운 증후군으로 정의됩니다.

 전문가들은 아바나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이 집단심인성 질환을 겪는다는 해석을 기피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들이 비밀스러운 첩보 무기로 공격받았거나, 뇌 손상과 같은 실제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심인성 장애가 가진 사회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판단이었죠.

 이언 해킹은 새로운 증후군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인간 유형 만들어내기(making up people)’와 ‘고리 효과(looping effect)’라는 두 가지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인간 유형 만들어내기는 누군가에게 특정한 유형을 정해주면, 그 사람이 유형의 특성을 받아들이도록 부추겨지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유형화 효과(classification effect)’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은 상호적으로 일어납니다. 새로운 사람이 어떤 유형에 속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만의 특성을 유형에 부여하게 되고, 그러면 유형의 특성 자체가 변화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형화가 인간을 변화시키고, 인간이 다시 유형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현상을 고리 효과라고 합니다.

 다시 아바나증후군으로 돌아가 봅시다.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환자들은 자연히 몸에 건강하지 못한 징후가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 몸은 다양한 백색 소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특정 부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언제나 증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자율신경계가 각성하면 백색 소음은 더욱 고조됩니다. 특히 아바나증후군이라는 명칭이 생긴 후부터는 환자들이 진단명을 사용하며 자신만의 특징을 진단명에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바나증후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심인성 장애가 발달하는 과정에는 거창한 계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심인성 장애를 앓을 수 있습니다. 병에 대한 사례가 충분하다면 집단에서 쉽게 전염되기도 하고요. 많은 환자가 자신이 심인성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거나, 심인성 장애의 개념을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심인성 장애는 치료가 가능한 하나의 질환일 뿐입니다. 심인성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성격적이거나 기질적인 결함이 있으리라는 사회적인 편견에 매몰되지 말고, 심인성 장애를 질환 자체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진단이 갖는 한계

 마지막으로, 진단 자체가 갖는 한계에 관해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서구의학의 기본 메커니즘은 어떤 증상을 종합해 환자의 상태를 규명하고, 진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체계적인 과정과 정확한 분별 덕분에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문화적으로 전파하는 데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병의 유무는 불변의 과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진단은 어느 정도는 임의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언제나 과잉 진단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앞서 아바나증후군의 사례에서도 살펴보았듯, 의학적 분류로 질병을 규정짓는 일 자체가 유형화 효과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진단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에게 고통을 신체화*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죠. 따라서 특정 증상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행위 자체도 질병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심인성 장애는 사회적인 요인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들은 생물학적 치료를 통해 회복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공동체 차원의 반응을 통해 회복됩니다. 미스키토인들의 사례처럼 그 방식에 의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을 때도 많습니다. 우리가 심인성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진단명을 찾거나 효과적인 약물을 개발하는 일이 아니라, 결함과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기사를 통해 심인성 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다정한 시각으로 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신체화*
신체적으로 병적인 증상은 있으나 의학적인 검사를 통해서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를 신체화 증상이라고 하며, 실제 신체질환이 아닌 심리적 스트레스나 갈등이 누적되어 나타난다.

 

참고문헌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수잰 오설리번, 한겨레출판(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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