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기자
©박정민 기자

노스리지 로드의 집

 린지 아다리오는 미국 코네티컷주의 웨스트포트에 있던 한 가정에서 네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린지의 부모님은 두 사람 모두 미용사였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딴 ‘필립 콰피어스’라는 미용실을 운영했다. 사람을 사귀는 것을 좋아하던 부모님이었기에 직원과 손님 등 여러 친구를 집으로 자주 초대했다. 당시 린지의 가족이 살았던 노스리지 로드의 집에 딸린 수영장과 잔디밭은 늘 파티를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린지는 인종이나 성지향성에 상관없이 모두 동료애가 넘쳤던 집안 분위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린지의 가족과 친하게 지내던 여러 사람 중 브루스라는 남성이 있었는데, 그는 린지의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미용학교를 다닐 정도로 린지의 가족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린지의 아버지와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린지가 여덟 살이었던 해, 린지의 아버지는 커밍아웃을 했다. 아버지는 브루스와 함께 뉴욕으로 떠났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남겨진 어머니와 자매들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야했다. 이후 15년간 아버지의 공백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부단한 노력으로 가정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어머니가 이별을 맞이할 때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어릴 적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손님으로서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집안 환경 덕에 린지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갈망하던 행복을 찾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열세 살 무렵, 아버지의 집을 방문한 어느 주말에 린지는 우연히 첫번째 카메라를 받게 된다. 아버지가 손님에게 받은 니콘 FG 모델로, 린지가 눈에 띄는 카메라에 관해 묻자 아버지가 이를 건네준 것이다. 린지는 아버지가 건네준 카메라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흑백사진 찍는 법>이라는 책자로 기본적인 조작법을 독학하고 달, 꽃, 묘지 등 사람이 없는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면서도 그녀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린지는 직업으로 사진을 대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1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하면서 취미 이상으로 미치지 않았던 사진에 대한 생각은 점차 달라졌다.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을수록 린지는 더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복잡다단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암실에서 만난 한 남자는 그녀의 사진들을 보고 매력을 느껴 엽서로 만들고 싶다면서 린지에게 말을 건넸다. 엽서라는 형태를 빌려 처음으로 그녀의 사진이 대중에게 내비쳐 보이게 된 것이다. 사진에 대한 대가는 받지 못했지만, 그 사진들은 엽서로 이탈리아의 휴양지인 리미니에서 판매되었고 린지는 이 경험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인쇄된 자신의 사진을 보게 된다는 오묘하면서도 뿌듯한 기분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다. 

 

젊음이 마주한 열정

 사진에 대한 린지의 애정은 더욱 깊어 갔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 린지는 더 근사한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를 원했다.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린지는 뉴욕에서 지내며 낮에는 패션 카탈로그 사진사를 돕는 인턴 일을, 밤에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했다. 돈을 모은 린지는 그 길로 사진을 찍겠다는 목적 하나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거리의 여러 사람을 카메라에 담으며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요광장에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의해 아들이 실종된 어머니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행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시위하는 어머니들의 표정 속에 남은 고통과 슬픔은 린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고 그녀는 이 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자신이 받은 인상과 감정을 사진에 정확히 담을 줄 몰랐고, 강렬한 장면을 찍기 위해 매주 광장을 다시 찾았다. 

 얼마 뒤 당시 남자친구였던 미겔도 린지를 따라 아르헨티나로 왔다. 그는 린지가 사람들에게 곧잘 질문하고 사진을 찍는 외향적인 면을 발견한다. 그리고 영자 지역신문인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에서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일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한다. 미겔의 제안은 린지에게 사진에 대한 열의에 더욱 불을 지폈고 자신의 열정이라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린지는 계속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의 문을 두드린다. 끈질긴 요청 끝에 어느 날 편집자들은 마돈나의 사진을 찍어오면 일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 광정에 위치한 정부 청사에서 마돈나가 영화 <에비타>를 촬영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린지는 마돈나의 사진을 찍게 되고, 그 사진은 다음 날 아침 신문 1면에 실리게 된다.

 그렇게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에서 일하게 된 린지는 어느 날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사진전을 보러 가게 된다. 그곳에는 세계의 여러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린지는 그 사진전에서 피사체의 존엄성을 담아내는 살가두의 열정과 디테일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다. 그리고 보도사진 촬영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이전까지 단순히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사진이 그 순간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사진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라고 당시의 감상을 떠올릴 정도로 그 사진전은 그녀가 큰 깨달음을 얻은 계기였다. 그렇게 린지는 사진의 가치는 사진을 찍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느낄 수 있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린지는 아르헨티나에서 쌓은 포트폴리오를 들고 ‘뉴욕 포스트’, ‘뉴욕 데일리 뉴스’, ‘AP 통신’의 사진 편집실 문을 두드렸다. AP 통신에서 꾸준히 일거리를 받기 시작한 린지는 베베토라는 선임 사진기자를 멘토로 사진을 배우기도 했다. 거의 처음으로 전문 사진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경험으로, 린지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법을 많이 배웠다고 회상한다. 또한 빛을 읽거나 포착하고 구도를 통해 사진에 공간감을 주는 방법 등 완벽한 사진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을 배워갔다. 이후 쿠바와 인도 등에 머물며 사진작가로서의 커리어도 계속해서 쌓아갔다.

 

아프가니스탄으로

 어느 날, 탈레반 치하의 삶을 취재하러 아프가니스탄에 출장을 다녀온 다우 존스의 인도지국장이 린지에게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문제를 취재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 약 90%를 장악한 상태였으며, 모든 여성들은 강제로 부르카를 착용해야 했고 여성의 인권이 매우 탄압 받는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탈레반의 검열이 심화된 시기였고 살아 있는 것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는 등 제약이 많았지만 린지는 의도만 선하다면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믿음 하나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다양한 여성들을 만난 린지는 한 여성의 말에 놀라게 된다. 부르카를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할 수 없고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여성들이 받고 있는 수많은 억압들 중 부르카가 가장 큰 불만일 것이라 생각한 자신을 반성한 것이다. 자유라는 특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고 있었음을 상기하며, 아프가니스탄이 자유를 되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해에도 두 번 더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다.

 

테러와의 전쟁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를 당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한 경험이 많았던 린지는 곧장 파키스탄으로 향했다.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것은 자살행위였기 때문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시작될 때까지 동료 기자들과 함께 파키스탄에서 기다린 것이었다. 린지는 종교를 떠나서, 파키스탄 여성들의 일상을 전하고 기존의 고정관념과 다른 인상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정치적 신념은 잠시 접은 채, 피사체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메신저로서 행동하는 습관이 이때 생겼다고 한다.

 탈레반이 무너질 때, 린지에게는 당시 애인이었던 욱스발과의 불화나 한 팀이었던 동료 기자와의 의견 차이 등 여러 고난이 있었다. 심지어 그 동료 기자는 취재를 따로 하자며 린지를 남겨둔 채 통역사와 운전자를 데리고 가버리기도 한다. 그 순간에 생존 본능이 발동한 린지는 ‘뉴욕 타임스’팀의 통역사 중 한 명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을 돕고 있는 반(反)탈레반 세력의 지도자 굴 아그하 셰르자이를 취재하기 위해 셰르자이의 저택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 한 것이다. 운 좋게도 그 통역사는 셰르자이를 잘 알고 있었고, 셰르자이가 지지자들과 함께 라마단 단식을 마무리하는 만찬을 즐기는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린지는 이라크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취재를 계속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

 2004년 여름 권력이 이라크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취재한 린지는 테러와의 전쟁을 취재하는 것을 멈추고 속보가 아닌 사진에 도전해보기로 한다. 아프리카로 시선을 돌려 차별적 정책을 내세우는 아랍계의 수단 정부에 맞서 아프리카계 흑인들로 구성된 반란군이 일으킨 다르푸르 분쟁을 다루기 시작했다. 콩고 내전에서 생겨난 강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회를 만들어 피해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기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이맘때쯤 린지는 인생의 동반자인 폴을 만나기도 했다. 일에 매진하면서도 연애도 자주 했지만, 불규칙적이고 위험한 자신의 직업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 정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로이터통신 터키지국장이었던 폴은 린지와 마찬가지로 일을 사랑했으며, 린지의 취재 과정에 함께 신나서 지지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일을 위해 떠날 때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랑해. 나는 여기 있어. 당신은 당신 일을 해, 그리고 다 끝나면 돌아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위험도 따랐지만, 린지는 일을 할 때 살아있음을 느꼈다. 사진은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순간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해주었다고 한다. 

 2009년에는 뉴욕 타임스 취재팀과 함께 작업한 <탈레바니스탄> 시리즈로 국제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016년에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남수단의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세 어린이의 기록을 담은 <난민> 시리즈로, 2018년에는 시리아의 난민 문제를 다룬 <집을 찾아서> 시리즈로 에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보도사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로버트 카파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린지 아다리오 역시, 그의 정신을 매번 기억하며 더 좋은 보도사진을 찍기 위해 전장 속 개개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참고문헌 |
<최전방의 시간을 찍는 여자>, 린지 아다리오,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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