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서운 사고는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도움을 줄 사람도,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봤던 동화나 만화영화에서도 그랬다.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어른들에게 알리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 어른들이 무사히 아이들을 발견했을 때,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야기는 끝났다. 안전에 대해서 우리가 1순위로 들었던 교육은 단 하나다. “무슨 일이 생기면, 빨리 신고하세요. 그리고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행동하세요.”

 중학교 때 학교를 마치고 오니, 커다란 배가 물에 잠긴 모습이 생중계되던 날을 뚜렷이 기억한다. 아무도 모르게 발생한 사고가 아니었다.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사고가 일어난 것을 알고 있었다. 새벽의 망망대해가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곧 모두가 구조되겠구나. 오늘의 뉴스는 무사히 구조된 사람들과 그 가족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채워질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의 “배에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 속에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 생생한 죽음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신문사실에서 밤새 기사 쓰기와 과제를 하고 있는 평범한 밤이었다. 뉴스 속보가 떴다. 핼러윈 파티로 밀집된 인파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몇 시간 뒤, 과제를 마치고 자기 전 뉴스를 확인했을 때, 사상자가 150명에 달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와는 또 다른 확신이었다. 바다도 아닌 서울 한복판이니까. 사고가 더 커지지 않을 줄만 알았다.

 8년 전, 나는 3주 후 야영이 예정되어 있던 중학생이었고, 올해는 친구들과 핼러윈 파티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대학생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안전 대책의 부재도, 총책임자의 행방도,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진정성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 안전을 한낱 농담거리로 만드는 사람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나이가 들면, 고위 공직자가 되면, 150여 명의 죽음에 웃을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지게 되는 걸까. 그 속에서 우리는, 나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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