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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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게으르다는 착각>은 아주 바쁜 현대인으로서 최고의 효율로 열심히 일했던 저자의 경험으로 시작한다. 생산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야무지고 부지런한 일벌이었으며,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유형이었다. 그런 그는 독감에 걸렸음에도 충분히 쉬지 않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독감을 앓아왔다. 오전에 바쁘게 일하고 진이 빠져 저녁에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죄책감에 휩싸이고, 그 죄책감은 다음 날 오전에 열심히 일함으로써 씻겨지는 악순환에 갇혀 있었다. 비단 저자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탈진을 겪고, 병을 얻고 건강에 비상 신호가 걸리자 그는 그제야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다. 그러자 30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있었던 열이 내렸고 심장의 잡음 소리도 없어지며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계가 있고 휴식이 필요한 것은 죄악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해야 한다고 배운 게으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책을  “게으름으로 비난받는 행동과 사회가 게으르다고 치부하는 사람을 전폭적으로 옹호하는 변론서” 라고 소개한다.

 

정말 게으름은 죄인가?

 사회는 ‘게으름’을 죄악으로 여긴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은 게으른 것이고, 노숙자들은 게으르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것이다. 충분히 열심히 노력했다면 그런 결과를 얻지 않았을 것이고, 분명히 현재보다 나은 상황을 맞이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노숙자들은 대부분 정신 질환을 앓고 있거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으며, 증세가 악화되는 악순환에 갇혀있다. 이렇게 흔히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표현하는 이들은 대개 한계에 이른 경우가 많다. 이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에서도 그렇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한계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책은 게으름이 세 가지 교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당신의 가치가 곧 당신의 생산성이다.”로, 이 믿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일하지 않으면 삶이 망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한계를 신뢰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은 유능한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은 무능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경향성에서 비롯된다. “힘들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감정을, 나태하고 무능한 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위험한 신호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신뢰하지 않고 무시하려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신념은 “항상 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신념은 우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생산성을 바라도록 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이러한 신념들로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생기고, 우리는 이를 철석같이 믿게 된다.

 

게으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Lazy’라는 단어는 1540년경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고, 당시에도 게으른 사람은 고통받아 마땅한 사기꾼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었다. 또한 신이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신호가 근면 성실이라 믿었던 청교도인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그들의 사상이 유포되었다. 식민지 미국은 정치적으로도 ‘게으른 사람’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신념 체계가 유용했고, 노예를 쉽게 다루기 위해 게으름이 죄악이라 가르쳤다. 그렇게 노동이 도덕성을 높인다는 사상이 강요되었고,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탄생했다.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서 장시간 일하게 되었고, 그렇게 게으름은 개인의 실패이자 사회악이 되었다.

 게으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게으른지, 게으를 수 있는지를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너무 바빠 힘든 사람일 뿐,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집중하기 힘들고, 피곤하다면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작가는 “시간 낭비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며 이를 받아들이면 건강하고 행복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다.”고 전한다. 

 

게으른 사람들

 우울한 사람, 늑장 부리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들은 보통 사회에서 게으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가는 각각의 부류에 대해 그들이 왜 게으른 사람이 아닌지 설명해준다. 우선 우울한 사람들은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이러한 점이 게으르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 즉 지친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싶어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다음으로 늑장 부리는 사람의 경우, 정해진 기한을 지키지 않고 늑장을 부리는 것은 일종의 반항이고, 조금만 일찍 일을 시작했다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늑장을 부리는 것은 주로 불안이나 혼란에서 비롯되어 완벽주의, 불안, 주의 분산, 실패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완벽함을 원하지만 완벽할 수는 없기에 집중을 할 수 없고, 기한이 다가올수록 불안해하며 결국에는 급하게 하거나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동기 부여가 되지 않고 무관심한 사람들, 예를 들어 학교의 과제에 무관심한 학생은 게으른 것일까? 작가는 무관심함의 원인을,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연관’과 같이 해당 일에 관심을 가질 만한 중요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공부에 무관심한 학생은 그 공부가 자신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해 관심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 예로는 가난이나 차별과 같은 상황으로 인해 삶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경우가 있다. 즉, 게으르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은 그저 게으른 것이 아니라 각자마다 행동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실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메일과 같은 디지털 업무 도구들이 생기며 하루의 노동을 마무리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직장 밖에서도 업무에 시달려야 한다. 특히, 필요에 따라 임시직이나 계약직을 고용하는 긱 경제(gig economy)로 인해 자유 시간에도 택시 운전, 번역 등의 추가 노동을 한다. 사람들은 끝까지 무리하며 일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한계가 있다. 주의와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휴식할 시간이 필요하다. 헨리 포드는 노동 시간을 주당 48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였더니 오히려 생산성이 높아짐을 발견했다. 즉, 오래 일한다고 생산성이 느는 것은 아니다. 한계를 넘어서면 효율성과 정확성은 떨어지고, 지치게 된다.

 

덜 일하는 방법

 우리는 일한 시간이 아니라 그 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몇 시간 일했는지보다 일의 결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를 통해 아무 결과도 얻을 수 없고 스트레스만 받는 반복적인 과업이 아니라,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고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 나아가, 일과 생활의 간섭 고리를 깨야 한다. 예를 들어, 업무 시간 외의 이메일에는 답장할 필요가 없다. 쉬어야 할 시간에도 일을 하면 일과 생활의 관계가 깨져버린다. 
우리의 가치를 얼마만큼 일하는지, 어떤 것을 달성해내는지에 두게 되면 끊임없이 일할 수밖에 없다. 나의 성취가 곧 나의 가치는 아니다. 성취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도 제대로 음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삶이 즐거운 순간에 오롯이 머물고, 온전히 만끽해야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시간을 내어 완전히 새롭거나 깊은 영감을 주는 것을 찾는다면, 더 큰 목적 의식과 자연과의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게으르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할 것이다. 게으르다는 생각은 우리가 ‘충분히’ 일하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힘에 부치면 게으르다 생각하고 자신을 채찍질해왔던 삶을 한번 되돌아보고, 게으름은 거짓이라는 것을 느꼈으면 한다.
 

©오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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