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립박물관의 ‘대전의 역사와 문화, 공간에 담다’ 전시에는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대전의 역사를 나타내는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는 대전의 유적이 선사 및 고대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현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분포해있는지 지도로 나타나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또한, 한국사 변천과 대전 역사의 변천을 타임라인으로 비교해주어 익히 알고 있던 한국사의 흐름 속, 대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전시회 입구에 있는 대전의 역사 타임라인, 한국사와 대전역사 변천이 함께 정리되어 있다.
전시회 입구에 있는 대전의 역사 타임라인, 한국사와 대전역사 변천이 함께 정리되어 있다.

대전의 여명, 선사와 고대

 구석기 시대의 슴베찌르개부터 통일신라시대의 산성과 보루까지 시대별 문화유산이 전시돼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구석기시대의 슴베찌르개와 빗살무늬토기였다. 슴베찌르개는 끝이 뾰족한 돌로 되어있어 찌르거나 가르는 데 사용되었다. 슴베는 다른 도구에 꽂거나 연결하는 부분을 말한다. 빗살무늬토기는 조각 여러 개가 발굴되었다. 대전의 신석기 유적은 둔산동을 시작으로 산서동, 송촌동, 관평동 등에서 발견되었다. 그중 둔산동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의 유적이 한 장소에서 발견된 곳이다. 

 박물관에는 보물 제1823호인 농경문 청동기의 복제본이 있는데, 유물 표면의 문양을 통해 청동기 시대 농경의례를 엿볼 수 있다. 앞면에는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쓴 남자가 밭을 일구는 모습과 그 아래 괭이를 들고 있는 사람,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는 사람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새겨 솟대를 표현했다. 농사짓는 모습과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솟대로부터 한 해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주술적 의식과 관련이 있는 의기로 추정된다. 아랫 부분은 결실되었지만, 가장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 여섯 개가 있고 닳아있는 것으로 보아 끈을 매달아 사용했다고 추측된다. 이 유물은 대전의 한 고물상이 수집한 것으로, 원본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고려, 불교의 융성

 보문사 터에서 발굴된 보살 좌상, 부처의 나발 조각, 보문산 마애여래좌상을 통해 고려 시대 불교문화가 융성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보문산 마애여래좌상은 중구 석교동에 있는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설법인과 유사한 손모양을 가지고 있다. 설법인은 부처가 최초로 설법했을 때의 손 모양으로, 고려시대 불상에서 주로 보인다. 부처의 나발 조각에서 ‘나발’은 부처의 머리카락을 뜻한다. 머리카락 조각만으로도 높이가 1.3~2.4cm로 파손되기 전에는 중대형 규모의 불상이었으리라 추측된다. 

 특히 대전의 상대동에서는 대규모 고려시대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다. 30여 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그곳에서 출토된 청자, 도기, 기화, 청동거울 등의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보문산 지역과 성북동 지역에서 대표적으로 생산된 고려청자도 전시되어, 그 비색을 감상할 수 있다. 

 

조선, 선비 문화

 조선시대의 관복 또한 전시되어 있었다. 벼슬을 하는 관리들은 신분에 따라 다른 색의 옷을 입고, ‘흉배’의 모양도 달라 신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흉배는 수를 놓은 장식품으로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하며 문무관과 품계를 구분한다. 문관의 경우 학, 무관의 경우 호랑이가 새겨져 있으며, 문관 당상관은 쌍학흉배, 무관 당상관은 쌍호흉배를 부착했다. 박물관에는 학이 새겨진 흉배가 전시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초상화가 성행하고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털 끝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기에 최대한 실존 인물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의 원칙과, 단순 외면이 아닌 정신을 그려낸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초상화 다섯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서양인이 그린 유화 초상과 우리나라의 초상화 기법을 비교할 수 있었다. 유화 초상의 경우, 얼굴 표현이 사실적이고 코끝과 양 볼과 같은 돌출 부위에는 밝은 색을 칠하고, 외곽선은 어둡게 칠해 서양화식 음영법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볼록한 부분은 홍기를 주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은 적갈색을 사용하는 음영법을 사용했다. 음영법에서 서양과 우리나라의 화법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시방 초상화는 젊은 시절의 그와 노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함께 있다. 특히 노년기의 초상화는 밑그림 두 점과 정본 초상이 함께 남아 서로 다른 점을 비교할 수 있었다. 

 500여 년 전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한글 편지 중 가장 오래되었다. 당시 함경도 군관으로 부임된 남편 나신걸이 집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편지 중에는 “분(화장품)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울고 가네”라는 글이 있다.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당시 부부간의 생활상과 소통을 파악할 수 있다. 적어도 1498년 이전 쓰인 것으로 보이며, 창제 50여 년 만에 한글이 충청 지역까지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격동 속의 근대, 그리고 오늘날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였고 대전에서도 인동장터, 유성장터, 유성헌병주재소 등 다양한 장소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유성장터 만세운동 판결문, 인동장터 만세운동 판결문, 군자금 납인 명령서 등이 그 때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유성장터에서 체포된 이권수의 상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태극기 몇 개를 만들어 가지고, 대중과 시장에 나가 독립 만세를 외치고 헌병에게 체포되었는데 끝내 징역에 처해졌으니 이것이 어찌 법률이란 말입니까? 만세를 부른 것이 죄인입니까….”

 1919년 일제는 대전 감옥소를 설립하였고 이곳에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심산 김창숙 등이 수감되었다. 일제 주요 감시 대상 인물 카드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수감 시절 만든 지승 그릇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가 자주 가는 대전역과 중앙로 등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도 전시실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대전을 발전시킨 교통의 중심인 대전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한눈으로 볼 수 있다.

 

 대전시립박물관은 코로나19로 인해 멈추었던 도슨트 활동을 지난 5월부터 재개했다. 전시해설사분들의 안내에 따라 전시를 감상한다면 대전의 역사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을 희망한다면 대전시립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 본 기사는 박물관 전시의 글과 이상휘 해설사님의 설명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장소 | 대전시립박물관
기간 | 상설전
요금 | 무료
시간 | 동절기(11~2월) : 10:00~ 18:00, 하절기(3~10월) : 10:00 ~19:00 (※관람종료시간 30분전까지 입장가능)
휴관 | 월요일, 1월 1일, 명절 당일
문의 | 042-270-86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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